“희망 없어 보여도/웃다보면 즐겁고/웃을 일이 없어도/웃으면서 삽시다/뒤돌아보면 힘든 내 삶이 슬프기도 하지만/별 인생 없는데 무얼 바라나/웃으면서 삽시다/웃으며 살자/상처가 별이 되게/나를 보고 모든 사람이/살아날 수 있도록….”
장영주가 부른 ‘웃으며 살자’(김민진 작사·곡)의 가사 일부분이다. 장영주는 이 노래를 지난 수년간 캠페인송처럼 노래해 왔다.
‘웃으며 살자’는 경쾌한 리듬의 세미트롯으로 매 구절을 또박또박 부르는 게 마치 어린이가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동요처럼 들리는 묘한 곡이다. 노래의 뒷부분 코러스에서 절로 따라 부르게 될 정도로 흥이 넘친다.
대중에게 그 이름이 다소 낯설겠지만 장영주는 경력 7년째인 중견 가수다. 지난 2016년 76세의 나이에 ‘언니’라는 노래와 함께 ‘웃으며 살자’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83세라는 고령 때문에 ‘할머니 가수’로 불리지만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 오빠 손잡고 콩쿠르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노래와는 인연이 없었다. 꼭 10년 전인 2013년 유방암 수술을 받고 독한 약을 먹으면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엎친 데 덮친다고 이듬해 자궁암 수술을 받고 또 다시 독한 항암치료를 받느라 죽을 지경이 됐다. 우울증이 도져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급기야 공기 좋은 곳에서 살자면서 40년 동안 살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경기도 부천시로 이사했다.
공무원 출신으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한 남편은 매일같이 우울증에 빠진 아내의 손을 잡고 공기 좋은 곳만 찾아다녔다. 두 노부부가 손잡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이 자신은 노래교실을 다니는데 건강에 좋다고 권유해 따라다니게 됐다.
부천시 새마을금고에서 마련한 노래교실이었는데 스타 노래강사로 유명한 박미현 교수가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박미현 교수는 유머감각이 뛰어난 데다 걸쭉한 Y담도 잘해 갈 적마다 노래교실이 웃음바다로 변하곤 했다.
우울증에 빠진 아내가 노래교실을 다녀와선 “실컷 웃었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에 노래 배우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남편도 마음을 열었다. 박미현 교수에게 1년을 배우자 “노래를 잘 부르신다”면서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 노래지도사 과정을 소개했다.
바로 등록을 하고 지하철 7호선 부천시청역에서 건대입구역을 매일같이 오가며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다.
노래를 배우면서 한층 건강해지자 담당 김민진 교수가 취입을 권하면서 ‘웃으며 살자’를 작곡해주고 음반으로 발표토록 도왔다. 2020년에는 직접 작사한 ‘추억 속에 내가 운다’(김덕 작곡)를 내놓았다.
노래를 부르면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는 모습에 방송과 행사무대에 서도록 남편이 적극 나서서 도왔다. 그 사이에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홀몸이 됐지만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2022년에는 ‘쫌생이’(김민진 작사·곡)라는 곡을 내놓으며 관심을 끌었다. 인정머리도 없고, 자신밖에 모르며,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세상의 치사한 남자들을 호되게 야단치면서 마음이 넓고 큰 그릇이 되라고 훈계하는 내용의 곡인데 엉뚱하게 비속어를 썼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쫌생이는 도량이 좁고 옹졸한 데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좀생이의 전라도 방언인데 그 단어를 비속어라고 판단한 방송심의에 납득이 되질 않았다. 세상의 못난 남자들을 마음껏 야단치며 풍자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는데 아깝게도 심의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할 수 없이 데뷔곡 ‘웃으며 살자’를 다시 부르면서 방송가에서 호평을 듣기 시작했다. 출연해달라는 각종 행사 무대가 늘어나면서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쫌생이’의 금지곡 판정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장영주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아 “노래는 나의 인생이니 계속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말하면서 넉넉한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