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 종목별 훈련으로 기량을 끌어올려야지, 이런 방식(해병대 훈련)은 구시대적 발상이다."(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원팀 코리아 훈련(해병대 훈련)이 구시대적 발상이란 평가는 매우 잘못됐다. 설문조사 결과 참가자 93%가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대한체육회(체육회)와 상위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의 대립각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이기흥 회장과 유인촌 장관은 공식 석상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감정의 골까지 가감 없이 드러낼 정도다.
대한체육회는 2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제27차 이사회를 열었다. 주요 안건이 승인된 후 이기흥 회장은 ‘체육계 현안에 관한 논의’를 제안했다. 그는 그동안 문체부와 대립 과정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후 범체육인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 논의는 한 시간 훌쩍 넘게 이어졌다.
체육회와 문체부가 올해 대립한 사건은 크게 세 가지다. 2027년 충청권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U대회) 조직위 구성에 관한 의견 대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 공식 사무소 설치 승인 관련 건, 그리고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 구성에 관한 내용이다.
충청권 하계U대회 조직위 구성에 관해서는 체육회가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조직위 구성원 선임에 거세게 반발한 바 있다. 문체부가 체육회의 반박을 수용하지 않고 대립이 이어지자, 결국 국무총리실과 국무조정실장의 조율에 따라 지난 6월 체육회의 의견이 관철됐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체육회의 로잔 사무소 설치에 대해 정부 예산까지 확정된 상황에서 문체부의 승인이 이뤄지지 않아 사무소 설치 및 인력 파견이 지체되고 있다며 체육회가 다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지난 20일 첫 회의가 열린 스포츠정책위 구성에 체육회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문체부가 독단적인 구성을 했다며 체육회 경기단체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체육인 일동이 성명을 발표, 일방통행에 유감을 표했다.
로잔 사무소 건에 관해서 문체부는 유인촌 장관이 직접 인터뷰에 나서 이를 설치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유 장관은 "로잔에 사무소를 둔 나라는 없으며 국제대회 유치가 목적이라면 필요할 때 설치하고 철수하면 된다", "긴축 재정 상황에서 매년 몇억 원씩 들어갈 현지 운영비를 당장 필요한 선수 육성 등에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날 이사회에 참석한 한 이사는 “태권도가 개별 종목 자격으로 로잔에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나 역시 처음엔 이게 꼭 필요한 건가 싶었는데 전혀 아니더라. 외교는 곧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분명 스포츠 외교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과 일본은 많은 스포츠 관계자가 로잔에 상주하고 있다. 한국 스포츠 관계자가 로잔에 있으면 당연히 외교에 도움이 된다”고 문체부의 해명에 대해 반박했다.
이기흥 회장은 스포츠 현장과 실무를 잘 알고 있는 체육회의 아이디어와 제안을 문체부가 귀담아듣지 않는다며 격정을 토로했다. 예를 들어 해병대 훈련 말고 과학적인 훈련을 하라고 하면서 정작 체육회 소속으로 선수들과 가까이 있어야 할 한국스포츠과학정책연구원(KISS)은 국민체육진흥공단 소속으로 넣어서 과학 훈련에 애로 사항이 많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기흥 회장은 체육회 분리 문제도 거론했다. IOC는 정치와 스포츠를 분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두고 있다. 따라서 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분리하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문체부가 이를 강제 분리하려 하는 것도 스포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이 회장은 성토했다.
체육회 이사들은 대부분 이기흥 회장의 주장에 크게 동조하는 분위기다. 문체부가 체육회를 무시하는 듯한 행보는 참을 수 없다는 감정적인 반응도 주를 이뤘다. 이사회는 그동안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문체부의 체육 관련 행정이 우왕좌왕했고, 이에 따라 체육 발전이 크게 저해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공익처분을 신청하는 등 공식적인 행동에 나서자고 의견을 모았다.
2023년 내내 이어진 체육회와 문체부의 갈등으로 인해 올해 체육 정책은 '불협화음'이란 한마디로 정리된다. 정책에서 발전된 결과물 없이 시끄러운 논란과 다툼 과정만 드러났다. 이게 성장통이 되어 향후 발전을 이루면 바람직하겠지만, 진정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려를 낳고 있다.
체육 정책의 난맥상을 지적하는 체육회의 방식은 그동안 이기흥 회장의 '강성 대응'으로 대표됐다. 문체부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모양새다. 체육회와 대화에 나서지 않은 채 체육회의 성명 발표 등에 반박 보도자료를 내는 정도로 대응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사안이 점점 커지는데도 대화 혹은 조정의 뜻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 지난 10월 취임한 유인촌 장관이 언론 전면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향이다 보니 체육회의 문체부의 갈등과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진정세가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부풀려지고 있다.
이날 이사회에 참석한 한 체육회 이사는 “다른 훈련 방식도 있는데 굳이 해병대 훈련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논란의 중심에 설 이유는 없지 않나. 강공과 연타를 번갈아 효율적으로 작전을 짜면서 우리의 진짜 목적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