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라는 감각적 영역을 말로 설명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최근 들어 자신들의 음악에 독자적인 이름을 붙여 당차게 설명하고 이를 보여주는 아티스트들의 행보가 눈에 띈다. 대표주자는 라이즈와 투어스다. 각각 ‘이모셔널 팝’, ‘보이후드 팝’이라는 신선한 명칭의 음악을 들고 나온 이들은 데뷔 초반부터 팬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가요 관계자들은 6일 이같은 명칭 자체에 대해선 마케팅적 성격이 짙다고 보면서도 “최근 아이돌 음악 트렌드는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 진화하는 분위기인데 팬덤 아닌 대중에겐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세계관 대신, 이미지와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장르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변주가 가능한 영리한 선택”이라 짚었다.
◇‘이모셔널 팝’으로 SMP 울타리 뛰어넘다
라이즈는 ‘겟 어 기타’를 시작으로 ‘토커 색시’, ‘러브 원원나인’까지 3연타 히트에 성공하며 5세대 톱 티어로 일찌감치 급부상했다. 이들은 데뷔 초부터 자신들의 독자 장르를 ‘이모셔널 팝’이라 소개하고 나서 그들의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라이즈의 ‘이모셔널 팝’은 ‘감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이전 보이그룹들과 차별화된다. 소속사는 “라이즈는 ‘함께 성장하고 꿈을 실현해 나아간다’는 팀명에서 알 수 있듯 데뷔 전부터 팬들과 함께 하는 리얼한 성장과 실현에 초점을 맞춰 소통하고 있고, 변화하고 진화하는 리얼타임 오디세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라이즈의 이모셔널 팝은 이들의 성장과 함께 매 순간 변화하며, 특정 분위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이렌’, ‘메모리즈’, ‘겟 어 기타’, ‘토크 색시’, ‘러브 원원나인’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이를 입증한다.
그간 다수 보이그룹들이 각각의 세계관에 따라 자신들의 음악을 소개해왔다. 세계관은 팬덤에게는 극강의 재미 요소가 됐지만 일반 대중에겐 진입장벽이 되는 양날의 검이었다. 반면 라이즈는 이모셔널 팝이라는 타이틀 아래 보다 변화무쌍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보이그룹의 경직되고 딱딱한 카리스마 이미지를 벗어나기 용이하다.
소속사는 “라이즈의 음악은 솔직함과 리얼함을 기반으로 하기에 같은 세대는 물론, 같은 감성을 공유하는 이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겟 어 기타’는 보이그룹에는 관심이 없지만 밴드 사운드에 관심 높은 3040 남성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고, ‘러브 원원나인’은 샘플링한 원곡 ‘응급실’의 향수를 기억하는 세대까지 사로잡으며 자신들의 음악 소비층을 확장했다.
◇당신들의 ‘보이후드’를 기억하고 응원해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신인 그룹인 투어스는 일명 ‘보이후드 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보이후드 팝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을 일컫는 말로, 맑고 청량한 팀 아이덴티티에서 확장한 투어스만의 독자 장르다. 이 장르에 대해 소속사는 “음표 하나하나, 가사 한마디 한마디에 소년 시절의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포착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자극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들의 타이틀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는 첫 만남의 설렘 속에 마주한 막연함을, 앞으로 함께할 빛나는 나날들에 대한 기대로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첫 등교의 설레는 마음,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등 소년시절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순간들을 포착해 담았다. 대중과 첫 만남을 앞둔 투어스의 현재 마음이기도 하다는 게 소속사의 설명이다.
보이후드라는 특정 시점을 전면에 내세운 장르인 만큼, 소년 시절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향후 이들이 선보일 음악에 투영될 예정이다.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보단 직설적·직관적이고, 사춘기의 어두운 느낌보단 누구에게나 있을(혹은 있었던) 찬란한 그 시절에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이 투어스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통해 그려질 것으로 기대된다.
◇엔믹스 ‘믹스팝’ 이제 다섯번 들을 필요 없죠
독자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 팀 중 음악적으로 돋보이는 팀은 단연 엔믹스다. 엔믹스는 아예 팀명에 믹스팝이라는 고유의 음악 정체성을 입혔다. 믹스팝은 두 가지 이상의 장르를 한 곡에 믹스해 다양한 멜로디를 차용한 음악으로, 극적인 변주를 통해 다이나믹한 전개가 돋보이는 장르다.
엔믹스는 2022년 2월 발표한 데뷔곡 ‘O.O’부터 다부지게 믹스팝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다이스’, ‘영 덤 스튜핏’, ‘러브 미 라이크 디스’, ‘대시’, ‘쏘냐르’ 등 코어하거나 라이트한 믹스팝 곡을 다수 선보이며 그들만의 변주를 이어가고 있는데, 점차 어색함 덜하고 세련된 장르 믹스로 음악적 호감도를 높이고 있다.
믹스팝은 그 자체로 팀의 정체성인 만큼 엔믹스로선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될 카드다. 하지만 장르 믹스라는 독특한 시도 대중적 호불호가 갈렸고, 멤버들은 “다섯 번 들으면 분명 빠져들 것”이라고 셀프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타 걸그룹들이 이지 리스닝이라는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과 달리 엔믹스는 2년째 믹스팝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데, ‘숏폼’ 시대를 맞아 점차 대중에 스며들어가는 분위기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한 곡 안에서 두 장르 이상을 보여주며 엔믹스 멤버들의 특장점인 장르 소화력을 돋보이게 하고자 했다. 신곡을 발표할 때마다 어떤 믹스팝을 선보일지 관심을 받을 만큼 엔믹스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다”고 자평했다.
아이돌 그룹이 독자 장르를 내세우는 데 대해선 일종의 마케팅 요소로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지만 K팝이 음악적으로 발전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이라며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하재근 대중음악 평론가는 “장르 이름은 포장지와 같은 것이고 중요한 건 콘텐츠의 완성도 여부다. 음악 수준 자체가 올라간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중요한 건 장르명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콘텐츠로 사람들과 공감을 이룰 것인가"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아이돌이 독자 장르를 디테일하게 따질 정도로 자신감이 생겨 자신들만의 개성을 찾아가고자 한다면 K팝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