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자존심에 또다시 생채기가 났다. 6만명이 넘는 홈 관중 앞에서 태국과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한국이 22위, 태국은 101위다. 지난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 이은 또 다른 망신살. 아시안컵 부진을 털고 분위기를 바꾸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황선홍 대표팀 임시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21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3차전에서 손흥민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한 채 태국과 1-1로 비겼다.
앞서 싱가포르를 5-0으로, 중국을 3-0으로 잇따라 완파했던 한국은 이날 무승부로 연승 행진에 제동이 걸렸다. 승점은 7(2승 1무)로 2위 태국(1승 1무 1패·승점 4)과 격차도 3점으로 유지됐다. 남은 월드컵 예선에 대한 부담도 그만큼 이어지게 됐다.
지난달 아시안컵 부진과 4강 탈락의 아쉬움을 이날 만원관중 앞에서 털겠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감독 체제에서 대회 내내 부진한 경기력에 그쳤던 한국은 64년 만의 우승 도전에 실패해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손흥민과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의 충돌 등 각종 논란까지 더해졌다. 분위기를 바꾸는 게 가장 중요했던 경기. 그러나 FIFA 랭킹 101위인 태국을 잡지 못하면서 결국 고개를 숙였다.
손흥민의 선제골도 빛이 바랬다. 손흥민은 팽팽한 0의 균형이 이어지던 전반 막판 이재성(마인츠05)의 땅볼 크로스를 왼발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한 뒤 포효했다. 그러나 손흥민의 골 이후 좀처럼 격차를 벌리지 못하던 한국은 한순간에 수비 집중력이 무너지면서 결국 뼈아픈 동점골을 실점했다. 끝내 이 균형을 다시 깨트릴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지난 아시안컵 부진과 각종 논란에도 이날 경기장은 6만명에 가까운 팬들이 몰렸다. 서포터스 붉은악마 응원석에는 ‘그냥 대가리 박고 뛰어, 응원은 우리가 할테니’라는 걸개가 내걸렸다. 붉은악마 등 관중들의 분노는 선수들이 아닌 정몽규 회장 등 대한축구협회로 향했다. ‘몽규가 있는 축협엔 미래가 없다’, ‘협회는 몽규의 소유물이 아니다’ 등 정몽규 회장을 직격 비판하는 걸개는 물론 이석재 부회장, 황보관 기술본부장 등을 비판하는 걸개가 내걸렸다. 경기 전은 물론 경기 내내 “정몽규 나가” 외침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고, 붉은악마의 외침은 일반 관중석에도 번지는 분위기였다.
이날 한국은 주민규(울산 HD)가 최전방 공격수로 나서고 손흥민과 이재성, 정우영(슈투트가르트)이 2선에 포진하는 4-2-3-1 전형을 가동했다. 황인범(츠르베나 즈베즈다)과 백승호(버밍엄 시티)가 중원에서 호흡을 맞췄다. 김진수(전북 현대)와 김영권(울산)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설영우는 수비라인에 섰다. 골키퍼는 조현우(이상 울산). 이강인은 우선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주민규는 33세 343일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러 70년 만에 역대 최고령 A매치 데뷔전 진기록을 썼다.
경기 초반 분위기는 태국이 잡았다. 차나팁 송크라신의 스피드를 앞세운 날카로운 공격에 한국 수비가 흔들렸다. 수비 지역에서 연이은 패스미스가 나오면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장면들도 적지 않았다. 전반 8분엔 수파차이 차이디드의 날카로운 슈팅이 한국 골문으로 향했지만 몸을 날린 조현우가 막아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뚫지 못하던 한국은 전반 19분 첫 기회를 잡았다. 황인범의 중거리 슈팅이 골키퍼에 맞고 흐른 공을 주민규가 재차 슈팅으로 연결했지만 빗맞았다. 정우영의 슈팅이 수비벽에 맞고 나오거나, 손흥민의 날카로운 프리킥이 수비에 맞고 굴절돼 골대 옆으로 흐르는 등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했다.
최전방에 포진한 주민규는 직접 슈팅보다는 연계 플레이로 팀 공격에 힘을 보탰다. 수비수를 등지고 패스를 전달하며 2선 공격진들에게 기회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주민규를 거친 공격이 잇따라 태국 수비를 흔들었다. 전반 37분 손흥민의 왼발 슈팅은 골대를 벗어나 아쉬움을 삼켰다.
팽팽하던 균형은 전반 42분 마침내 깨졌다. 왼쪽 측면을 파고든 공격이 통했다. 이재성이 수비 뒷공간을 완전히 허물었고, 문전으로 컷백을 내줬다. 문전으로 쇄도하던 손흥민이 왼발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해 골망을 흔들었다. 자칫 경기 흐름이 꼬일 수도 있었던 상황에 터진 중요한 선제골이었다.
손흥민은 골을 넣은 직후 포효한 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주민규 등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직접 어시스트한 이재성 등 다른 모든 선수들과도 일일이 포용하며 기쁨을 나눈 뒤 관중들에게 찰칵 세리머니까지 선사했다.
전반을 1-0으로 앞선 한국은 교체 카드 없이 후반을 치렀다. 후반 8분엔 결정적인 추가골 기회가 찾아왔다. 아크 정면에서 정우영의 왼발 슈팅이 태국 골문을 노렸다. 슈팅은 그러나 골키퍼 선방에 막혔다. 정우영은 머리를 감싸 쥐며 아쉬움을 삼켰다.
기회를 놓친 한국은 후반 16분 일격을 맞았다. 상대 논스톱 패스 한방에 수비 집중력이 크게 흔들리면서 왼쪽 측면 수비 공간이 뚫렸다. 루크 사 미켈손의 슈팅이 빗맞았지만, 문전으로 쇄도하던 수파낫 무에안타가 문전에서 마무리했다. 오프사이드 여부가 관건이었으나 온사이드 상황이었다.
황선홍 감독은 정우영 대신 이강인을, 주민규 대신 홍현석(KAA 헨트)을 투입하며 변화를 줬다. 손흥민이 대신 최전방에 포진했고, 이강인이 오른쪽 측면에 포진했다. 이강인이 투입되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응원했다. 이강인도 특유의 드리블과 크로스로 측면에서 공격의 활로를 뚫어내려 애썼다. 후반 25분엔 이강인의 패스를 손흥민이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해 ‘합작골’을 노렸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황 감독은 조규성(미트윌란)과 이명재(울산) 투입하며 전방과 측면에 변화를 줬다. 그러나 교체 카드 이후에도 좀처럼 이렇다 할 한 방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이 높은 볼 점유율을 유지하며 경기를 주도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기회까지는 만들지 못했다. 팽팽한 1-1 상황이 이어졌다.
골과 승리를 바라는 관중들의 응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국도 방향을 가리지 않고 태국의 빈틈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공격수까지 깊숙하게 내려서 두텁게 수비벽을 쌓은 태국을 무너뜨릴 묘책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후반 막판 손흥민의 패스를 받은 황인범의 슈팅은 골키퍼 선방에 막혔고 이어진 이강인의 슈팅도, 김영권의 가슴 트래핑 슈팅도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경기는 1-1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한국축구 역사에 또다른 굴욕으로 남은 결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