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2024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개막전 서울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경기에 앞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가 마운드에 올라 시구를 했다. 특히 박찬호는 '파드리스(PADRES)’와 '다저스(dodgers)’가 절반씩 들어간 '파드저스(PADgers)’ 유니폼을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미국의 많은 언론도 박찬호의 역사적인 시구를 보도했다. 필자는 반반 유니폼에 대한 현지 야구팬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두 팀의 유니폼을 합쳐 만든 ‘스플릿 저지(split jersey)’는 미국의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팬이 “Burn that jersey(그 저지를 불태워라)”, “Stupid jersey, shouldn’t have been allowed (바보 같은 저지, 허락하지 말아야 했어)”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팬들은 박찬호의 스플릿 저지에 호응했다. 이들은 “PADGERS!!!(파드저스)”, “The Padgers are my favorite baseball team of all time(파드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팀이야)”, “I remember back when he pitched for Padgers. Good times(박찬호가 파드저스를 위해 뛰었던 때를 기억하지. 좋은 시절이었어)”, “Oh cool, the San Angeles Padgers(오 멋지네, 샌 앤젤레스 파드저스)”같은 식으로 호감을 표했다. 또한 박찬호는 다저스 선수였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Padgers’보다는 ‘Dodres’가 더 어울린다는 의견도 많았다.
박찬호의 스플릿 저지에 호감이 많은 이유는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팬들은 양 팀에서 뛰었던 선수가 입는 스플릿 저지에 관대했다. 두 번째 이유는 파드리스와 다저스의 관계에 기인한다. 최근 파드리스의 전력이 급부상하며 다저스의 신흥 라이벌이 되었고, 많은 파드리스 팬들이 다저스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다저스 입장에서 파드리스는 형을 이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지만, 거의 언제나 시원찮은 모습을 보이는 동생 같은 팀이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만약 다저스의 전통적 라이벌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합쳐진 스플릿 저지를 착용했다면, 팬들의 반응은 훨씬 나빴을 것이다.
MLB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은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다. 2022년 4월 한 야구팬이 베이비 루스와 그의 등번호 3번이 새겨진 양키스와 레드삭스 스플릿 저지를 착용한 적이 있다. 이 저지를 찍은 사진은 온라인에 널리 퍼졌고, 절대다수의 팬들은 이를 야구 역사상 가장 추악한 유니폼이라고 비난했다.
왼쪽은 2021년 3월 BT 스포츠의 해설 위원인 크리스 서튼이 노리치 시티와 블랙번 로버스가 섞인 ‘반반 셔츠(half-and-half shirt)’를 입은 모습. 서튼은 노리치에서 데뷔했고, 블랙번으로 이적해 앨런 시어러와 함께 1994~95 프리미어리그(EPL) 우승을 합작했다. 한편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 서튼은 BBC 해설 위원으로 많은 전문가 중 가장 정확한 예측을 해 ‘인간 문어’로 등극했다. 오른쪽 사진은 블랙번과 고향 팀인 뉴캐슬에서 260골을 기록해 EPL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된 앨런 시어러. 2002년 11월 시어러는 블랙번과 뉴캐슬에서 각각 100골을 달성한 기념으로 두 클럽의 셔츠가 섞인 반반 셔츠를 받았다. 서튼과 시어러의 반반 셔츠는 팬들의 반감을 사지 않았는데, 그들이 거쳐간 노리치와 블랙번, 블랙번과 뉴캐슬이 라이벌 관계가 아닌 것이 크게 작용했다. BT Sport 캡처, 시어러 인스타그램 파드저스 저지에 대한 호감과 함께 현지 팬들은 크게 3가지 반응을 보였다. 우선 박찬호가 전혀 늙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는 지금도 25살로 보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또한 박찬호를 상대로 한 이닝에 만루 홈런을 2개 친 페르난도 타티스 시니어와 발차기를 당한 팀 벨처 얘기도 많이 나왔다. 박찬호의 시구를 팀 벨처 또는 현재 샌디에이고 소속의 타티스 주니어가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위트 있는 반응도 있었다. MLB 엑스 필자는 예전 칼럼에서 현재 EPL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반 스카프’를 다룬 적이 있다. 원래 반반 스카프는 컵 파이널, 자선 경기 등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축구장의 관중이 중산층과 특히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으로 채워지면서, 2010년대 이후 EPL의 모든 경기장에서 반반 스카프는 급속히 늘어났다. 진짜 팬이라면 한 클럽만 응원해야 하기 때문에, 플라스틱 팬(가짜 팬)과 관광객들의 상징인 반반 스카프는 현지에서 혐오의 대상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많은 찐 팬들이 반반 스카프보다 훨씬 싫어하는 것이 바로 반반 셔츠다.
왼쪽은 리버풀과 헐 시티가 새겨진 반반 셔츠를 입은 여성 팬의 모습. 오른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첼시가 섞인 반반 셔츠를 입은 남성 팬의 모습. 데일리메일 스포츠 엑스, BBC 스포츠 언론인 Mark Chapman 엑스 위의 사진에 등장한 반반 셔츠를 입은 두 명의 팬에 갖가지 비난이 빗발쳤다. ‘축구에 대한 범죄’, ‘평생 축구장 출입 금지’, ‘광대’, ‘축구의 명복을 빈다’는 그나마 얌전한 표현이었다. 차마 여기에 옮길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말이 남발했다. 특히 21세기 들어 신흥 라이벌이 된 맨유와 첼시의 반반 셔츠에 원색적인 욕이 쏟아졌다. 맨유와 첼시를 합친 셔츠 자체가 플라스틱 팬과 관광객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B조에 속했다. 사진 은 영국 지상파 방송 ITV의 기자 조나단 스웨인이 카타르 현지에서 웨일스와 잉글랜드가 섞인 반반 셔츠를 입고 두 나라의 경기를 예측하는 모습. 스웨인이 착용한 반반 셔츠에 시청자들은 분노했고, 그는 SNS를 통해 다시는 ‘용서할 수 없는(unforgivable)’ 셔츠를 입지 않겠다고 사과해야 했다. ITV 캡처2024년 2월 17일 토트넘과 울버햄튼이 맞붙었다. 사진은 당시 경기장에서 손흥민과 황희찬이 새겨진 반반 셔츠를 입은 한국 팬의 모습. 영국 내에서도 논란이 된 이 셔츠는 언론을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일부 국내 언론은 인종 차별에 맞춰 이를 보도했으나, 이 팬이 비난을 받은 이유는 현지에서 혐오의 대상인 반반 셔츠를 입었기 때문이다. EPL Bible 엑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반반 스카프에 비해, 반반 셔츠는 주로 팬이 직접 만든다. 팬은 보통 두 개의 멀쩡한 레플리카 셔츠를 잘라낸 후 셔츠의 반반을 꿰맨다. 바느질에 재주가 없는 이는 최소 30파운드 이상의 수수료를 지불한다고 한다. 따라서 반반 셔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2개의 셔츠 가격+선수 이름, 번호, EPL 패치 마킹 가격+수수료’가 들어간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200파운드(34만원)의 금액과 정성이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반반 셔츠에는 온갖 조롱과 멸시가 쏟아진다.
반반 셔츠가 불쾌감을 유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축구팬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응원하는 클럽을 정한다. 한번 팀이 정해지면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팬들은 끝까지 클럽과 함께하며 고통을 감내한다. 이들은 복수의 클럽을 응원하지도 않고, 입장권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클럽을 갈아타지도 않는다. 팬들은 클럽의 ‘고객(customers)’이 아니라 ‘서포터스(supporters)’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의 오랜 전통을 부정하고 태동한 상업화의 산물인 반반 셔츠는 팬들을 단순 소비자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이들은 화가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