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퀸메이커’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배우 서이숙이 또다시 회장님 캐릭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전작과 다른 점은 품위는 티끌조차 없는 ‘K재벌 시어머니 속성’이라는 것.
서이숙은 지난달 31일 마지막회가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화인가 스캔들’에서 화인그룹 회장 박미란 역을 연기했다. 재벌 상속을 둘러싼 암투극을 그린 이 작품에서 서이숙은 극의 히로인이자 며느리인 오완수(김하늘)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매운맛’을 담당했다.
출신성분으로 사람을 하대하고, 장남만을 싸고도는 박미란은 일일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리셰 캐릭터다. 수상한 에스테틱을 받으며 스스로에 도취하는가 하면, 물건을 집어 던지고 고함을 치는 것은 예삿일이다. ‘흙수저’ 주제에 장남과 결혼한 완수를 천시하면서도 이용하며 공을 가로채는 뻔뻔함도 있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인물을 ‘보는 맛’ 있게 완성한 것은 내내 파워풀한 서이숙의 열연이다. 특히 완수의 경호원 서도윤(정지훈)과 유도로 겨루는 장면에선 독특한 긴장감도 형성했다. 잠깐만 쉬자며 정지훈의 품에 기댄 서이숙은 순간 사심이 있나 싶더니, “냄새만 잘 맡으면 네가 어떤 놈인지 다 알 수 있다”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을 섬뜩한 눈빛으로 표현했다.
엄마 탓을 하는 장남 김용국(정겨운)에게 윽박을 지르려다가도 눈물을 일렁이며 “이 모든 걸 이룬 사람은 바로 나야”를 말할 때는 비뚤어진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심복에게 배신감에 차 “종놈 주제에!”라고 외칠 때는 천박함조차 품격있게 빛내는 명품연기였다.
유튜브 디즈니플러스 공식 채널에서 공개된 쇼츠 영상 중에서도 서이숙이 등장하는 클립은 조회수 20만 대로 유독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댓글에서는 “어이없는 내용도 빛내는 보석 같은 연기”, “대사가 귀에 쏙쏙 박힌다”라며 호평이 이어졌다.
‘제중원’(2010)의 명성황후 역으로 드라마에 데뷔한 서이숙은 ‘짝패’, ‘인수대비’에 연달아 출연하며 한동안 사극 이미지가 컸다. ‘나쁜 엄마’ 등 현대극에서 동네 이웃 엄마 역도 맡았지만, 강한 눈빛과 목소리를 살려 재벌 사모님과 CEO를 연기했을 때 더 주목을 받았다. ‘퀸메이커’에선 으레 남성 배우가 맡아온 무게 잡는 재벌 총수를 카리스마 있게 소화해 젊은 여성팬들까지 사로잡았다.
‘2연속 회장님’이 될 법도 했던 이번 작품을 서이숙은 다른 색깔로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뉴스에 나오는 부정적인 재벌의 모습도 결핍에서 비롯된 것 같아, 일의 전문성보단 결핍에서 오는 성질 등을 포인트로 잡아 연기했다. 그래서 박미란은 푼수끼가 좀 있다”고 설명했다.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호텔 델루나’(2019)에서는 1인 6역 마고신 조차 능숙하게 소화한 서이숙의 기반은 연극 무대에서 쌓아온 내공 덕이다. 서이숙은 극단 ‘미추’의 멤버로 20여년 동안 마당극 조연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연극 ‘허삼관 매혈기’(2003)로 첫 주연을 맡은 후 상도 받으며 무명 생활을 청산하기 시작할 즈음인 지난 2011년 갑상선암을 진단받았다.
당시를 두고 서이숙은 채널A ‘4인용식탁’에서 “이제 겨우 할 만한데 그랬다. 수술해서 회복이 좋아 연습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 그때 처음으로 많이 울어봤다”라고 돌아보기도 했다. 아픔을 딛고 탁 트인 목소리를 되찾은 그는 이후 40여 편의 작품에 도전하며 힘 있는 연기를 이어오고 있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서이숙은 드라마에서 중년 배우라는 어려운 조건으로 출발했다”며 “그럼에도 연극계에서 오래 쌓아온 내공으로 배역들을 개성 있게 소화해 내며 자신을 각인시키는데 성공, 영상계에서도 중요한 배우로 자리매김 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