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유격수는 공격보다 수비 중요성이 강조된 포지션이었다. 물론 과거 거포였던 '미스터 컵스' 어니 뱅크스나 대형 유격수 시대를 활짝 연 '철인' 칼 립켄 주니어처럼 공수를 겸비한 유격수도 있었다. '빅리그 3대 유격수'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데릭 지터·알렉스 로드리게스·노마 가르시아파라도 빼놓을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시대가 변하면서 유격수의 수비가 아닌 공격 능력을 둘러싼 위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메이저리그(MLB) 공식 홈페이지 MLB닷컴에는 '유격수의 해'라는 기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올 시즌 각종 공격 지표 상위권을 유격수들이 장식하고 있다. 코리 시거(텍사스 레인저스) 프란시스코 린도어(뉴욕 메츠) 트레이 터너(필라델피아 필리스) 같은 베테랑 유격수는 물론이고 바비 위트 주니어(캔자스시티 로열스) 거너 헨더슨(볼티모어 오리올스) 엘리 데 라 크루스(신시내티 레즈)처럼 젊은 선수들이 소속팀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
세이버메트릭스 지표 중 하나인 wRC+(조정득점생산력)는 리그 평균 선수를 100으로 본다. 올해 유격수 포지션의 평균 wRC+는 106(이하 27일 기준)으로 평균보다 살짝 높다. 언뜻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는 1900년 이후 유격수 포지션 최고 수치. 또한 MLB가 30개 팀으로 개편된 1998년 이후 유격수 포지션의 누적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이 가장 높았던 건 2019년의 96.8인데 올 시즌 유격수 포지션 WAR이 91.6. 현재 페이스라면 역대 최고 114.8이 가능하다.
포지션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 OPS(출루율+장타율)도 모두 높다. 타율은 포지션 중 1위(0.256)이고 나머지 세 지표는 지명타자에 이은 2위이다. 이런 흐름은 기존 스타 유격수 시거·터너·린도어 이외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맞물린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AL) 신인왕 헨더슨은 벌써 홈런 33개를 때려냈다. 위트 주니어는 타율과 득점, 최다안타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애런 저지(뉴욕 양키스)와 최우수선수(MVP) 경쟁에 들어갔다. 데 라 크루스는 20(홈런)-60(도루) 클럽에 기압한 상황. 이외에도 잭 네토(LA 에인절스) 오닐 크루스(피츠버그 파이리츠) CJ 에이브럼스(워싱턴 내셔널스) 메이신 윈(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이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1998년만 하더라도 각 팀의 주전 유격수 중 OPS+가 평균 기준인 100을 넘은 선수가 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무려 17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유격수의 비약적인 공격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예년과 달리 어느 정도 공격력을 갖추면 수비가 다소 약하더라도 팀마다 출전 기회를 보장하는 분위기에 기인한다. 두 번째는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처럼 해외에서 재능 있는 선수가 꽤 많이 유입됐다는 점이다. 각 팀의 주전 유격수 30명 중 14명이 미국 이외 외국인 선수들이다. MLB닷컴 선정 마이너리그 톱 유망주 100명 중 23명이 유격수라는 걸 고려하면 현재 흐름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상에서 회복 중인 김하성이 잔여 시즌 타격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흥미롭다. 이미 수비에선 MLB 최정상급 유격수로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타격은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비만큼 중요한 게 공격. 현재 MLB 트렌드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