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캠퍼스 라이프를 시작한 흥수(노상현)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과감한 스타일과 눈치 보지 않는 거침없는 성격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 신입생 재희(김고은)다. 여느 남자 동기들처럼 흥수 역시 재희에게 이끌리지만 이성적 설렘이 아닌 호기심, 딱 거기까지다.
특별한 접점 없이 지내던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인 건 어느 늦은 밤, 우연히 클럽 앞에서 만나면서부터다. 재희는 이 자리에서 흥수가 동성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흥수는 망연자실하지만, 재희는 그날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되레 흥수를 ‘아웃팅’ 위기에서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태생적인 아웃사이더 기질과 유흥 본능으로 의기투합한 흥수와 재희는 급기야 동거를 시작하고 가족보다 가깝고 애인보다 애틋한 관계를 구축한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장르로 정의하자면 퀴어물에 가깝다. 주인공 중 한 명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흥수가 게이다. 그 사실이 비밀일 것도 반전일 것도 없다. 10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동명 소설(이 영화는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 실린 단편 ‘재희’를 원작으로 한다) 자체가 이미 스포일러다.
물론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단편 소설이 영상화되면서 수많은 곁가지가 덧대진 까닭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은 풍성해졌고, 몇몇 지점에서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사의 핵심 축을 흥수와 재희가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서 재희의 이야기와 감정의 진폭이 원작보다 풍성해졌다. 이 과정을 거치며 영화는 단순 퀴어물을 넘어 청춘물로 전환됐고, 자연스레 대중성을 획득했다.
이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성정체성에 관한 사회적 이슈나 갈등을 요체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메가폰을 잡은 이언희 감독은 특정 사랑의 형태를 강제로 이해시키거나 주입시키지 않는다. 사랑의 정상 범위를 규정하는 이들을 강하게 규율하지도 않는다. 대신 가장 반짝이는 20대,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며 서로의 성공을 빌어주는 두 친구의 성장에 집중한다.
따로 또 같이 성장하는 재희와 흥수의 행로는 대부분 유머러스하고 경쾌하게 그려지지만, 결코 휘발되지 않는다. 이 감독은 두 주인공이 함께 걷는 13년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그저 나답게 살면 누구나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남긴다. 방황하는 청춘들에게는 묵직한 위로로 치환될 만한 유의미한 메시지다.
다만 메인 캐릭터 자체가 상업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는 유형들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고비를 맞닥뜨릴 때도 있다. 가감 없는 게이의 세계에 경악할 수도 있고, 그에 맞서는 경박한 사생활에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위트 넘치는 대사와 보편적 에피소드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두 캐릭터의 매력과 사연에 온전히 빠져드는 순간이 온다.
극을 이끄는 두 배우 김고은과 노상현의 공은 상당하다. 개개인의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외형적으로나 연기적으로나 합이 좋다. 둘의 로맨스가 아닌 만큼 섹슈얼한 사랑의 감정을 교류하지는 않지만, 이들 간 주고받는 호흡은 여느 멜로물보다 달콤하고 짜릿하다. 특히 화끈하고 유쾌한 티키타카는 낄낄거리는 웃음과 흐뭇한 미소를 교차로 선사한다. ‘대도시의 사랑법’ 최대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