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인천 SSG-KT전에서 발생한 벤치클리어링. 흥분한 SSG 에레디아(오른쪽)를 동료들이 막고 있다. SSG 제공
지난주 프로야구에선 초유의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했다. '피치클록' 고의 지연으로 인한 신경전에서 비롯됐다.
지난 4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SSG 랜더스와 KT 위즈의 대결. KT 투수 윌리엄 쿠에바스와 SSG 타자 길레르모 에레디아가 신경전을 벌였다. 1회 말 타석에 들어선 에레디아가 1구 만에 타임을 요청했다. 더그아웃으로 이동해 배트 손잡이에 그립 스틱을 바르며 시간을 지체하자 투구 템포가 꼬인 쿠에바스가 투구 지연으로 응수하면서 신경전이 시작됐다.
쿠에바스가 피치클록을 위반한 건 아니었다. 규정상 투수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25초 안에만 공을 던지면 된다. 쿠에바스는 시간을 어기지 않았지만 템포가 평소보다 느렸다.
이에 에레디아가 한 차례 더 타임을 요청했다. 이강철 KT 감독이 항의했다. 이번엔 에레디아가 타석에 들어선 뒤에도 타격 자세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 투수의 투구 지연을 유발했다는 주장이었다.
4일 인천 KT-SSG전에서 충돌한 KT 쿠에바스-SSG 에레디아. 사진=SPOTV/티빙 캡쳐
에레디아도 규정을 위반하진 않았다. 타석당 타자의 타임아웃 횟수는 최대 2회이고, 타자는 피치클록 8초 전까지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타석에 들어선 뒤에도 완벽하게 타격 준비 자세를 취하지 않아 이강철 감독의 지적을 받았다.
문제는 3회에 발생했다. 이번엔 에레디아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피치클록 시간을 모두 채우고 타석에 들어섰다. 10초를 남기고 타석에 들어선 뒤 나머지 2초 동안 타격 준비에 나섰다. 이는 쿠에바스를 흔드는 데 성공했다. 0-2 카운트에서 피치클록 제한 시간을 넘겨 볼 카운트 페널티를 받은 쿠에바스는 이후 볼 2개를 더 던져 풀카운트까지 몰렸다.
다시 한번 이강철 감독이 나와 에레디아의 고의 지연 의혹을 제기했다. 심판도 이강철 감독의 항의 이후 타자에게 재차 경고했다. 이번엔 이숭용 SSG 감독이 나왔다. 에레디아가 피치클록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어필했다.
SSG 이숭용 감독이 피치클록 고의 지연과 관련해 심판에게 항의하고 있다. SSG 제공
결국 벤치클리어링으로 번졌다. 에레디아가 볼넷을 걸러 나가면서 쿠에바스에게 항의했고, 이를 말리려던 선수들이 뛰어나왔다. 시즌 1호 벤치클리어링이자, 피치클록으로 발생한 KBO 초유의 벤치클리어링이었다.
지난달 17일 LG 트윈스와 NC 다이노스의 시범경기에서 발생한 벤치클리어링까지 포함하면 두 번째다. 당시 LG 타자 박해민이 자신의 루틴에 맞게 타격을 준비한 한편, NC 투수 김태경이 피치클록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공을 던지다가 촉발된 충돌이었다.
타자 박해민의 고개는 마운드가 아닌 3루측을 향해 있다. 사진=중계 화면 캡처.
현 피치클록 규정엔 고의지연에 대한 페널티는 없다. 시즌 전 감독자 회의에서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고의 지연을 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을 뿐, 심판이 판단해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선수들에게 빠른 준비를 주문하는 경고만 줄 뿐이다.
일각에서는 투·포수간 볼 배합 사인을 주고 받는 피치컴(Pitch Com)을 이용한 고의 지연도 우려하고 있다. 피치클록 시간이 임박했을 때 피치컴의 통신 오류를 핑계로 끊어 페널티를 피할 수 있다는 우려다. 애매한 고의 지연 규정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다.
김병주 KBO 심판위원장은 본지와 통화에서 "선수들의 템포와 루틴이 평소와 다르고, 경기 흐름에 지장을 줄 정도로 늦어지면 심판이 관여해서 구두 경고를 주긴 한다. 하지만 심판이 고의지연 여부를 판단해 페널티까지 주는 건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피치클록은 경기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도입한 거지, 페널티를 주려고 시행하는 건 아니다. 이를 악용하는 선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앞으로 피치클록 관련 규정을 보다 세세하게 다듬을 필요는 있다고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제 피치클록 첫 해라 시행착오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규정을 세분화하고 다듬어서 잘 정착시켜야 할 것 같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