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은 생각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한화 지휘봉을 처음 잡은 2015년, 권혁과 박정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을 던진 불펜 투수였다. 올해 상황은 더 악화됐다.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선발진이 붕괴됐다. 선발 원투펀치로 내정된 에스밀 로저스와 안영명이 개막을 앞두고 부상당했다. 이태양과 윤규진·배영수 등은 수술 뒤 재활 중이었다.
지난해와 같이 불펜을 무리하게 가동했다. 권혁과 송창식·정우람·심수창 등 특정 불펜 투수의 등판 빈도가 매우 높아졌다. 선발투수를 조기 강판시키는 특유의 투수 교체는 이미 부하가 걸린 불펜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연투는 기본에 4일, 5일 연투도 있었다.
무리한 기용은 결국 부상으로 이어졌다. 권혁은 팔꿈치 통증으로 8월 24일 전력에서 이탈했다. 송창식은 9월 1일 팔꿈치 염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둘은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고, 나란히 수술대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한화 주요 투수들은 차례로 수술대에 올랐다. 2015년엔 4월 이태양(팔꿈치), 9~10월 최영환(팔꿈치), 10월 윤규진(어깨), 배영수(팔꿈치), 이동걸(무릎)이 수술을 받았다. 올해엔 3월 임준섭(팔꿈치), 6월 에스밀 로저스(팔꿈치), 7월 안영명(어깨)에 이어 10월에는 송창식과 권혁이 차례로 수술자 명단에 올랐다.
▶ '메이저리거' 로사리오
한화는 1월 22일 새 외국인 타자 윌린 로사리오를 영입했다. 로사리오보다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화려했던 외국인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사리오는 그들에게 없는 젊음이 있었다. 발표된 몸값은 130만 달러. 한화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강력한 외국인 타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15년 팀 득점 순위는 6위에 그쳤다. 로사리오의 한화 입단은 미국 언론에서 화제였다. NBC 스포츠는 계약 당시 "로사리오가 완벽한 선수는 아니지만, 마이너 계약을 하지 않고 일본도 아닌 한국을 선택한 건 놀랍다"고 평했다.
시즌 초반 그는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지 못해 부진했다. 그러나 본래 타격 폼을 되찾은 뒤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127경기에서 타율 0.321(492타수 158안타)·33홈런·120타점·78득점을 기록했다. 장타율(0.594)과 출루율(0.367)을 합친 OPS는 0.960이다. 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더그아웃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충실했으며, 팬 서비스도 적극적이었다.
◇ 이럴 줄은 몰랐지
▶ 로저스, 대전의 영웅에서 먹튀로
시즌 전 한화의 포스트시즌 진출 예상은 외국인 투수 에스밀 로저스를 근거로 한 것이다. 지난해 대체 외국인 선수로 입단해 문자 그대로 압도적인 피칭을 했다. 하지만 로저스는 올해 한화 가을 야구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됐다.
로저스는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투구를 하다 팔꿈치 이상을 느꼈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개막전 엔트리 합류가 불발됐다. 에이스의 이탈은 팀 성적 추락으로 직결됐다. 선발진이 붕괴된 한화는 4월 한 달 동안 6승17패, 승률 0.261을 기록했다. 6월 들어 승률을 끌어올렸지만, 4월 부진에 끝내 발목이 잡히면서 7위로 정규 시즌을 마무리했다.
구단은 로저스를 잡기 위해 외국인 선수 역대 최고액인 190만 달러를 투자했다. 투자의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왔다. 돌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로저스의 반전은 예상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하지만 지난해 무리한 투구가 결국 부상과 팀 내 불화로 이어졌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 육성 실종
김성근 감독이 프로야구에서 '명장'으로 인정받은 변곡점은 1996~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이다. 만년 약체 쌍방울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SK에서 한국시리즈를 세 번 우승하기 전에도 김성근 감독은 '약팀을 강팀으로 만들 수 있다'는 평을 받았다. 강훈련에 기반한 그의 지도 스타일은 오래전부터 논란이 됐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식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선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한화 지휘봉을 잡은 뒤 두 시즌 동안 이렇다 할 선수를 발굴하지 못했다. 투수진의 경우 구단이 고액 연봉을 부담한 선수를 혹사시키는 게 사실상 전략의 전부였다. 한화에는 뛰어난 야수들이 있었다. 김태균은 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지명타자였고, 이용규는 최고의 중견수였다. 2루수 정근우와 1루수 로사리오도 톱 레벨급 선수였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포지션에선 눈에 띄게 활약한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타율 0.325에 17홈런을 때려 낸 3루수 송광민 정도가 예외다. 33세 송광민에게 '육성'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유격수 하주석과 우익수 양성우가 팀 내에서 돋보였지만, 리그 전체로 보면 두드러지지 않았다. 김 감독의 신임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좌익수로는 타격이 좋은 이성열보다 수비가 좋은 장민석을 중용했다. 타고투저 시즌에 '수비가 좋은 좌익수'의 가치를 그렇게 중시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한화 구단은 시즌 뒤 '육성' 업무를 김 감독에게서 분리해 박종훈 신임 단장에게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