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에 역동적인 오버핸드 투구폼. 메이저리그(MLB) 사이영상을 두 차례 받은 팀 린스컴을 연상하게 하는 한화 이글스 윤산흠(23)의 모습이다. 2019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던 그는 독립리그를 거쳐 2021년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입단 1년 만에 위력적인 투구를 보여주며 한화 불펜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윤산흠은 올 시즌 25경기에서 24와 3분의 2이닝 동안 33개의 삼진을 잡아내고 있다. 그가 기록 중인 9이닝당 탈삼진(K/9) 12.04개(9월 1일 기준)는 20이닝 이상 던진 투수 중 1위다.
윤산흠은 어떻게 '닥터 K'가 됐을까? 그가 던지는 구종은 직구와 커브 두 개에 불과하다. 대신 두 구종 모두 경쟁력이 높다. 현장에서 수준급의 수직 무브먼트를 갖췄다고 평가받는 직구는 타자의 헛스윙을 쉽게 끌어낸다. 커브 역시 높은 회전수와 구속(스탯티즈 기준 시속 127.8㎞)을 바탕으로 타자들을 잡아내고 있다.
윤산흠은 '투 피치' 투수다. 직구(50.7%)와 커브(48.2%)를 거의 1대1 비율로 던진다. 올 시즌 20이닝 이상 불펜 투수 중 윤산흠보다 커브 구사율이 높은 불펜 투수는 없다. 직구-커브 1대1 투피치 조합을 가진 선수들이 MLB에는 여럿 있다. 제임스 카린책(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맷 반스(보스턴 레드삭스), 타일러 더피(미네소타 트윈스)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균 시속 95마일(153㎞) 이상의 패스트볼과 82마일(132㎞) 이상의 빠른 커브를 던진다는 것이다.
KBO리그에서는 흔하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KBO리그에서는 빠른 커브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투수들 대부분은 각이 큰 대신 스피드가 느린 커브를 던진다.
하지만 윤산흠은 희귀하게 구속이 빠르고, 낙폭도 큰 커브를 던진다. 실제로 올 시즌 윤산흠보다 커브 구속이 높은 선수는 9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 대부분 주 무기는 커브가 아닌 시속 150㎞ 이상의 강속구와 고속 슬라이더다.
윤산흠이 삼진을 뺏어내는 건 단순히 커브가 빨라서가 아니다. 두 개로 단순화된 구종은 상·하로 각기 다르게 투구됐다. 스트라이크존(S존)을 상·중·하로 삼등분했을 때, 윤산흠의 패스트볼은 주로 S존 상단(투구 비율 52.3%)에 집중돼 있다. 반면 커브는 S존 하단(투구 비율 50.7%)을 주로 향했다.
이유가 있다. 타자들의 구종 판단은 공이 투수의 손에서 떠난 시점부터 이뤄진다. 직선에 가깝게 뻗는 패스트볼인지,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인지를 타자가 파악하고 대처하는 건 공의 초반 이동 방향에 달린 셈이다. 투구에 대한 현대적 분석을 추구했던 MLB 투수 트레버 바우어는 이를 조기 식별(Early Identification)이라고 개념화하기도 했다.
올해 클리블랜드의 셋업맨으로 20경기 평균자책점 1.23을 기록 중인 제임스 카린책 역시 조기 식별 이론을 활용 중이다. 터널링 이론에 따르면 직구와 커브의 이동 경로가 최대한 비슷해야 효과적이다. 커브는 일반적으로 타자의 눈높이에서 무릎까지 떨어진다. 카린책은 커브를 타자의 눈높이에 맞춰서 던진다.
S존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직구(하이 패스트볼) 역시 타자의 눈높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두 구종이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는 지점은 상반된다. 과거 투구의 상식으로 여겨지던 '낮은 직구'는 시작 시점부터 타자의 무릎을 향하기 때문에 타자의 조기 식별이 쉽다. 커브볼러 카린책은 낮은 직구 대신 하이 패스트볼로 타자의 조기 식별을 최대한 어렵게 만들었다.
카린책의 투구 원리는 윤산흠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 하이 패스트볼과 커브의 조합, 시작점에서는 비슷하게 움직이나 홈플레이트에 가까워질수록 다른 방향을 향한다. 사실상 윤산흠의 투구 패턴은 하나다. 하이 패스트볼과 낮게 떨어지는 커브가 전부다. 타자는 터널링(tunneling, 일정 구간까지 타자가 구종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던지는 기술.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같은 궤적을 공유하는 것)으로 인해 조기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두 구종이 1대1로 날아오기 때문에 하나의 구종을 노리기도 쉽지 않다. 두 구종 모두 수준급의 구속과 무브먼트를 지녔기에 정타를 때리기 어렵다.
여기에 극단적인 오버핸드 투구폼도 윤산흠의 진화를 도왔다. 윤산흠은 머리 위에서 공을 던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높은 릴리스 포인트를 형성한다. 이 투구폼 덕분에 상하 무브먼트가 수준급인 패스트볼과 반대 방향으로 떨어지는 커브 조합 효과는 배가된다. 윤산흠은 이 터널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터널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구종의 상하 움직임 차이뿐 아니라 좌우 무브먼트의 차이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높은 릴리스 포인트를 이용해 12시 방향에서 6시 방향으로 떨어뜨려야 터널링 효과가 커진다. 패스트볼과 극단적인 오버핸드 투구폼은 이런 움직임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윤산흠은 터널링에 적합한 폼과 구종을 가지고 있다.
육성 선수로 입단해 방출됐고, 독립 리그를 거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의 투구 폼을 만들었다. 그 스토리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끝에 그는 리그에서 흔하지 않은 스타일의 투수로 진화했다. 아직 제구력과 체력 등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삼진을 뺏어내며 타자를 압도하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입증해냈다. 그가 '특이한' 투수가 아닌 '특별한' 투수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