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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없는 사자는 어떻게 잉글랜드 대표팀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한 3월 A매치 기간이 막을 내렸다. 이 기간 축구 종가 잉글랜드 대표팀은 2026 북중미 월드컵 유럽 예선전을 소화했다. 독일 출신 토마스 투헬이 감독으로 부임한 잉글랜드는 알바니아와 라트비아를 맞아 2연승을 거둬 산뜻한 출발을 알렸다.잉글랜드 대표팀은 ‘삼사자(The Three Lions) 군단’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는 삼사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잉글랜드에는 살지도 않는 사자가 어떻게 이들의 상징이 됐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2마리나 4마리가 아닌 3마리 사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갖은 독자분들도 분명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래서 준비했다. 잉글랜드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사자가 이들의 상징이 된 이유를. 우리는 흔히 백수의 왕인 사자는 아프리카 대륙 사하라 사막 이남의 사바나 일대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자는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유럽 동남부와 중부에서도 서식했다.유럽에 살았던 사자를 ‘동굴(cave) 사자’라고도 부른다. 이 사자들이 실제로 동굴에 살지는 않았지만, 화석화된 유해가 처음 발견된 곳이 동굴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동굴 사자의 수컷은 갈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모습은 현재의 사자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의 덩치는 현대의 사자보다 25% 더 컸다.동굴 사자는 약 1만2000~1만4000년 전 영국에서 멸종했다. 멸종 이유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나, 기후 변화가 결정적인 이유로 꼽힌다. 영국에서 야생의 동굴 사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동물원에서 사는 등의 형태로 존재했다. 종종 외교 선물로 아프리카의 사자가 영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바베리(Barbary, 북아프리카의 옛 이름) 사자’라고 불린 이들의 유해는 ‘런던 탑(Tower of London)’에서 발견되었다.사자는 유럽 곳곳에서 용맹함의 상징이 된다. 고대 로마 군단의 상징도 사자였고, 바이킹과 중세 유럽 전역의 귀족 가문도 사자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사자와 영국 왕실과의 인연은 ‘잉글랜드의 사자’라고 불렸던 호전적인 군주 헨리 1세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사자는 힘, 용기, 품위, 자부심과 같은 '영국다움(Britishness)'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동물로 여겨지게 된다. 원래 헨리 1세의 문장에는 한 마리의 사자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벵의 아델리자와 결혼한 헨리 1세의 문장에는 사자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장인의 상징도 사자였기 때문이다. 그 후 헨리 2세는 1152년 아키텐의 엘리노어와 결혼한 후 사자 한 마리를 더 문장에 추가했다. 엘리노어의 가문 문장에도 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인 리처드 1세는 선조들의 세 사자를 왕실 연합의 상징으로 사용했다.‘사자심왕(Lionheart)’으로도 널리 알려진 리처드 1세가 사자 세 마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리처드는 단순히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이 아니고, 노르망디와 아키텐 공국의 영주이자 군주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노르망디의 상징은 사자 두 마리, 아키텐의 상징은 사자 한 마리였다.이렇게 12세기 후반부터 세 마리의 사자는 영국 왕실의 상징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헨리 1, 2세와 리처드 1세는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남부 프랑스인에 더 가까웠다.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인 이들은 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노르망디 공작 등도 겸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 언어, 문장 모두 프랑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세 마리의 사자는 1863년에 설립된 FA의 공식 엠블럼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1872년 세계 최초의 국제 경기를 스코틀랜드와 가져 0-0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이때부터 잉글랜드 대표팀은 삼사자가 그려진 셔츠를 입게 된다. 또한 원래 FA의 삼사자위에는 왕관이 놓여있었다. 그러나 1949년 FA는 잉글랜드 크리켓협회의 엠블럼과 차별화하기 위해 왕관을 삭제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축구, 크리켓 외에도 잉글랜드의 하키, 복싱협회도 삼사자를 로고로 쓰고 있다.삼사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잉글랜드에서 열린 유로 96을 앞두고 나온 ‘Three Lions’라는 노래다. “Football's Coming Home”이라는 가사로도 유명한 이 노래는 당시의 상황을 적절히 표현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축구장에서 즐겨 불린다.노래 중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Three Lions on a shirt, Jules Rimet still gleaming(셔츠에 새겨진 세 마리의 사자, 여전히 빛나는 쥘 리멧).” 쥘 리멧은 1966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을 물리치고 우승한 후 잉글랜드의 전설 보비 무어가 들어 올린 오리지널 월드컵 트로피를 가리킨다. “Thirty years of hurt never stopped me dreaming(30년간의 상처가 제 꿈을 멈추게 한 적은 없습니다).” 30년간의 상처는 잉글랜드가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로 1996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 못한 것을 의미한다.2026년 북중미 월드컵이 열릴 때 잉글랜드 팬들은 “Sixty years of hurt never stopped me dreaming”을 외칠 것이다. 잉글랜드의 꿈이 60년 만에 이루어질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2025.03.29 11:11
산업

대명소노그룹, 괌 온워드 망길라오·탈로포포 골프클럽 인수

대명소노그룹이 연초부터 글로벌 확장에 힘을 싣고 있다. 먼저 괌 대표 골프장 ‘온워드 망길라오 골프클럽’과 ‘온워드 탈로포포 골프클럽’을 연달아 인수했다.대명소노그룹은 온워드리조트앤골프가 소유한 온워드 망길라오 골프클럽과 온워드 탈로포포 골프클럽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4일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1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대명소노그룹은 이번에 인수한 두 골프장을 각각 ‘소노펠리체 컨트 리클럽 괌 망길라오’와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탈로포포’의 브랜드로 변경해 운영한다.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망길라오·탈로포포는 괌내 운영되고 있는 다섯 개의 골프장 중 두 곳으로 천혜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코스 레이아웃을 자랑하며 전세계 골퍼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골프 명소다.먼저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망길라오는 괌 동부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태평양을 조망하며 플레이할 수 있는 코스로 명성이 높으며, 괌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과도 차량으로 15분 거리에 위치해 접근성도 뛰어나다. 규모는 대지면적 33만평에 18홀 코스를 보유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골프 코스 설계가 로빈 넬슨이 디자인한 코스로 유명하며, 2012년 골프 전문매체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골프 코스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티샷으로 바다를 넘겨야 하는 12번 홀은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망길라오의 시그니처 홀이자 골퍼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코스로 정평이 나있다.괌 남부 내륙에 위치한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탈로포포는 18홀 코스에 대지면적 35만평 규모로 샘 스니드, 벤 호건 등 전설적인 PGA(미국프로골프) 투어 선수들이 설계한 코스로 유명하다. 특히 지형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자연 친화적 코스로 난이도 있는 전략 플레이를 선호하는 골퍼들에게 인기가 높다. 대명소노그룹은 지난 2019년 베트남 ‘소노벨 하이퐁’ 위탁 운영을 시작으로, 2022년에는 미국 워싱턴 DC ‘노르망디 호텔’, 2023년에는 뉴욕 ‘33 시포트 호텔 뉴욕‘, 2024년 프랑스 파리 ‘담 데 자르 호텔’, 하와이 ‘와이키키리조트호텔’을 인수하며 글로벌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국내에서는 3개의 18홀 골프장을 운영중이며(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비발디파크 이스트 및 웨스트,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델피노), 해외에서는 베트남에서 27홀 골프장인 소노펠리체 하이퐁 CC를 위탁 운영중이다. 대명소노그룹이 해외에서 골프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티웨이항공을 인수한 바 있는 대명소노그룹은 이번 괌 골프장 두 곳의 인수를 통해 해외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하는 동시에 티웨이항공이 주 7회 운항중인 괌 노선과 골프장을 연계한 상품 개발, 향후 단지내 골프텔 운영 검토 등 골프-항공-숙박을 결합한 시너지 또한 기대하고 있다.대명소노그룹 관계자는 “국내외 골프장 및 호텔·리조트의 운영 노하우를 기반으로 소노펠리체 컨트리클럽 괌 망길라오 및 탈로포포의 성공적인 운영과 더불어 ‘소노(SONO)’를 통한 통합된 여행 경험을 제공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권지예 기자 kwonjiye@edaily.co.kr 2025.03.04 10:52
산업

서준혁 대명소노그룹 회장, 본격 티웨이항공 경영 참여 공표

서준혁 대명소노그룹 회장이 소노인터내셔널을 필두로 티웨이항공에 대한 본격 경영권 행사에 나섰다. 소노인터내셔널은 22일 티웨이항공에 경영개선을 요구하고 주주명부 열람등사 청구 및 주주제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소노인터내셔널은 지난 20일 티웨이항공과 정홍근 대표이사를 대상으로 △경영진의 전면 교체 △ 티웨이항공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유상증자를 요구하는 경영개선요구서 전달했다. 오는 3월 예정된 정기 주주총회 의안 상정을 위한 주주제안 전달과 주주명부 열람등사는 지난 21일 요청했다. 소노인터내셔널은 이번 경영개선요구서에서 “티웨이항공은 현재 항공 안전의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부족한 정비 비용과 인력, 항공안전감독에 따른 높은 개선지시비율을 미뤄볼 때 항공 안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토교통부가 평가한 운항 신뢰성 부족과 연쇄적인 행정 조치에 따른 과태료 부과 등으로 인해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라며 안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주주제안을 통해 신규 이사 선임에 대한 의안 상정을 요청하고,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해 안정적인 항공사 운영 전략 수립한다는 방침이다. 항공업과 호스피탈리티 산업의 시너지 극대화하고 재무 구조 개선 등을 이룬다는 계획이다. 소노인터내셔널 관계자는 “티웨이항공의 성장과 주주가치의 제고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며 “재무 건전성과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여 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자 이번 경영개선요구 및 주주제안을 전달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소노인터내셔널은 국내 18개 호텔·리조트에 1만 1000여 객실 수를 자랑하는 국내 최대 규모 리조트 기업으로, 지난 2019년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사명과 브랜드를 ‘대명’에서 ‘소노’로 변경하고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2019년 베트남 ‘송지아 리조트’의 위탁운영으로 첫 해외 진출에 성공해 ‘소노벨 하이퐁’으로 브랜드를 변경했고, 2022년에는 미국 워싱턴 DC ‘노르망디 호텔(The Normandy Hotel)’, 2023년에는 뉴욕 ‘33 시포트 호텔 뉴욕(33 Seaport Hotel New York)‘, 2024년 프랑스 파리 ‘담 데 자르 호텔(Hotel Dame Des Arts)’, 하와이 ‘와이키키리조트호텔’을 인수해 안정적으로 운영중이다. 서준혁 대명소노그룹 회장은 "대명소노그룹의 풍부한 국내·외 인프라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 출시와 고객서비스 강화를 통해 티웨이항공의 고객만족도를 극대화하고 주주가치 제고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이번 항공 산업 진출을 대명소노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글로벌 리딩기업으로 도약하겠다”라고 말했다. 권지예 기자 kwonjiye@edaily.co.kr 2025.01.22 09:19
스포츠일반

마크롱도 보러 온 파리올림픽 성화, 프랑스 도착...1만 2000㎞ 여정 시작

2024 파리 올림픽에 올려질 성화가 드디어 프랑스에 도착했다.미국 CBS 등은 외신들은 올림픽 성화를 실은 19세기 범선 벨렘이 8일(현지시간) 오전 프랑스 남부 도시인 마르세유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배 1000여 척과 함께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벨렘은 성화를 보기 위해 모인 시민 15만명으로 북적이는 항구에 도착했다. 올림픽 4관왕 수영선수 플로랑 마노두가 성화를 해변으로 가져왔고, 패럴림픽 선수 난테닌 케이타가 이를 받았다. 래퍼인 쥘이 다시 케이타에게 성화를 이어받은 후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성화를 보기 위해 여러 유명인사도 마르세유를 찾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물론 전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토니 파커,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축구 선수 디디에 드록바 등 스타들이 연예계 인사들과 함께 퍼레이드에 참가했다.이번 올림픽 성화는 그리스에서 출발, 벨렘 호를 타고 12일간 항해 끝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앞으로 프랑스 본토와 해외령을 거쳐 68일 동안 1만 2000㎞를 돈 후 파리에 도착할 예정이다. 프랑스 남서부와 서부 해안을 따라 노르망디로 이동, 브루타뉴에 도착한다. 프랑스령인 기아나, 레위니옹, 폴리네시아 역시 거친다. 봉송 주자는 총 1만 1000명이 예정됐다. 프랑스 65개 영토, 450개 이상 마을과 도시를 통과할 계획이다. 특히 동굴 벽화로 유명한 라스코, 중세 요새 카르카손, 베르사유 궁전, 몽생미셸, 루아르 성, 포도밭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각종 명소들도 방문한다. 명소뿐 아니라 잔 다르크, 샤를 드골, 에디트 피아프 등 프랑스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도 이 과정에서 재조명할 예정이다. 여정을 마친 성화는 오는 7월 26일 파리 올림픽 개막장인 센 강에 도착해 봉송된다.한편 이날 마르세유에는 경찰 등 약 6000명이 배치돼 안전 관리에 나섰다. 프랑스는 지난 3월 모스크바 콘서트홀 공격 세력으로 파악된 ISIS-K가 프랑스도 공격할 계획이 있다고 폭로한 뒤 최고 수준의 테러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4.05.09 10:40
연예일반

올해 칸 영화제 초청작 ‘베테랑2’ 유일…韓 영화 2년 연속 경쟁 진출 불발 [종합]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영화는 ‘베테랑2’가 유일하다. 그러나 경쟁 부문에서는 한국 영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11일 오전 11시(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UGC 노르망디 극장에서 진행된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베테랑2’가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 초청작 중 하나로 호명됐다.‘베테랑2’는 지난 2015년 개봉한 ‘베테랑’의 후속작이다. ‘베테랑’에서 서도철 역을 맡은 황정민이 다시 한번 주연하며 오달수, 장윤주, 오대환, 김시후, 정해인 등이 출연한다.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로 ‘제58회 칸 국제영화제’ 비공식 부문인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바 있으나, 공식 부문에는 이번이 최초 초청이다. 황정민은 ‘곡성’, ‘공작’에 이어 주연작으로 세 번째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베테랑2’ 초청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은 칸 국제영화제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장르 영화를 소개하는 비경쟁 부문이다. 해당 부문을 통해 지난 2014년 ‘표적’부터 지난해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탈출: PROJECT SILENCE)까지 한국 영화를 꾸준히 상영해왔다.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진출한 한국 영화는 없다. 한국 영화는 지난 2000년 ‘춘향뎐’을 시작으로 ‘올드보이’, ‘극장전’, ‘밀양’, ‘박쥐’, ‘시’, ‘아가씨’, ‘그 후’, ‘버닝’. ‘기생충’, ‘헤어질 결심’ 등이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오승욱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이 주연한 ‘리볼버’도 경쟁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것이란 추측이 있었으나 불발됐다.한편 ‘제77회 칸 국제영화제’는 다음 달 14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칸 일대에서 개최된다.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4.04.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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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 ‘베테랑2’ 칸 영화제 간다…미드나잇 스크리닝 초청

영화 ‘베테랑2’가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됐다.11일 오전 11시(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UGC 노르망디 극장에서 진행된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베테랑2’가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 초청작 중 하나로 호명됐다.이로써 한국 영화는 ‘헌트’,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탈출: PROJECT SILENCE)에 이어 ‘베테랑2’까지 3년 연속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됐다. 국내 프랜차이즈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베테랑2’는 지난 2015년 개봉한 ‘베테랑’의 후속작이다. ‘베테랑’에서 서도철 역을 맡은 황정민이 다시 한번 주연하며 오달수, 장윤주, 오대환, 김시후, 정해인 등이 출연한다.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로 ‘제58회 칸 국제영화제’ 비공식 섹션인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바 있으나, 공식 섹션에는 이번이 최초 초청이다. 황정민은 ‘곡성’, ‘공작’에 이어 주연작으로 세 번째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한편 ‘제77회 칸 국제영화제’는 다음 달 14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칸 일대에서 개최된다.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4.04.1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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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만사] ‘1947 보스톤’ 영화감독 강제규의 귀환

강제규 감독은 세상에 알려진 것에 비하면 작품 연출 편수가 그리 많지 않아 놀라게 되는 감독이다. 1996년에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그는 이번 ‘1947 보스톤’까지 지난 27년간 총 6편의 영화만을 연출했다. 거의 4년에 한 번씩 영화를 찍었다. 이번 영화가 사실상 3년 전에 찍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4년마다 방점을 찍은 게 맞긴 맞는 얘기가 된다. ‘올림픽 감독’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번 영화는 코로나 때문에 개봉이 늦춰져 ‘장수상회’ 이후 햇수로 물경 8년만에 만나는 셈이 됐다. 그 사이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 강제규 감독은 ‘원로’ 감독(?) 취급을 받는 나이가 됐다. 하기사 요즘 기준으로 보면 영화 한 편을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극장에 걸기까지 족히 4년은 걸린다. 옛날처럼 후딱후딱, 대충대충, 그래서 늘 아쉬운 대로 빨리빨리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강제규는 영화 만들기에 정상의 호흡과 간격 대로 영화를 만들어 온 셈이다.그런데 꼭 작품 편수를 그렇게만 따지면 안된다. 강제규의 필모그래피는 사실 20편이 넘는다. 감독만이 아니라 제작자로도 활동 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고대(古代) 소재의 블록버스터 ‘단적비연수’가 그가 제작한 영화 중 하나이다. 이미숙 주연의 ‘베사메무초’도 2001년 개봉 당시 나름 화제를 모았던 그의 프로듀서 작품이었다.강제규는 1999년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뉴 코리언 시네마의 한 축에서 한국영화도 대중적이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첫 사례였다. ‘쉬리’ 이후부터 한국영화계에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열렸다고도 볼 수 있다. 뉴 코리언 시네마가 시작됐다.강제규 영화의 특징은 주로 역사, 전쟁, 분단, 이념 같은 거대담론의 얘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쉬리’는 북한 무장 침투조와 남한 첩보 조직의 대결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군과 인민군을 사이를 오가는 형제의 얘기였다. 6.25 전쟁 영화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한국 전쟁영화는 전투씬에서 개각도 촬영(일명 셔터 스피드 촬영을 말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특정적인 잔상을 강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총알이나 포탄이 튀는 장면 같은 것)이란 것을 시도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현대영화였다. 흥행에 실패했던 대작영화 ‘마이 웨이’는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과 소련,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다. ‘장수상회’는 노년 세대가 겪은 전쟁의 아픔을, 단편 ‘민우씨 오는 날’은 이산가족의 문제를 비교적 정면으로 다룬다. 강제규는 대놓고 ‘국뽕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더욱 더 남다른 것은 그의 ‘국뽕’은 조직이나 이념에 충성하자는 식의, 다소 경직된 국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강제규 국뽕의 특징은 인간주의이다. 품격을 갖춘 국뽕이며 생각과 고민이 들어 간 국뽕이다. 그의 국뽕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게 강제규가 지난 20여녀간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동력이다. 전쟁과 가난, 이념의 간극과 그 분기점에서 인간은 늘 실존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태극기 휘날리며’의 형, ‘마이 웨이’의 주인공)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늘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음을 얘기한다. 강제규의 영화가 늘 울컥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다 지나간 얘기이니 이제는 괜찮지 않냐는 아픈 정서가 담겨져 있다.새영화 ‘1947 보스톤’은 공개되기 전까지 그렇고 그런 옛날 영웅담일 거라 생각됐다. 영화가 늦게 공개된 후, 기이하게도 오히려, 시대의 분위기와 그 싱크로율이 척척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 국민들, 민중들은 다 자신 나름대로 애국과 국익을 위해 살아왔음을 보여 준다. 손기정과 남승룡과 서윤복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1947년에 나라도 없을 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들을 응원하고 지원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다 그랬다는 것이다. 이 영화 ‘1947 보스톤’은 서윤복이 최고 기록을 갱신하며 1위를 하는 장면보다 먼 이국 땅, 세계 사람들은 있는지도 몰랐던 조선의 사람들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 환호의 절규를 내지를 때 살짝, 같이 눈시울을 적시게 되는 영화이다.강제규가 비중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한국 영화계가 역사적으로 자꾸 쪼그라들고 오므려 들 때, 줄기차고 일관되게 역사와 사람, 정치와 이념의 문제를 소재로 영화를 찍는, 그것도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점이다. 그런 감독은 한 나라의 영화계에서 한 명쯤은 데리고 있어야 한다. 그가 새로 준비하고 있는 두 편의 영화, 방송 6부작 다큐멘터리 한편과 장편 극영화 한편은 모두 실로 거대한 이야기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 또 4년, 4년 씩 도합 8년이 걸릴 것인가. 이제는 조금 서두르기를 바랄 뿐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2023.09.2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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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템플기사단의 후예라 말할 수 있는 축구대표팀은?

잉글랜드의 축구, 럭비 심지어는 크리켓 팬들도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 성전기사단) 코스프레를 하고 자국의 대표팀을 응원하곤 한다. 지난 칼럼을 통해 잉글랜드 팬의 이러한 템플기사단 혹은 십자군 복장은 무지에서 비롯된 코미디에 가깝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템플기사단의 유산을 물려받은 축구대표팀은 과연 누구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템플기사단은 유럽에서 토지, 성(castle)등을 포함해 많은 자산을 기증받았다. 기사단은 교황의 지시에만 복종했으며, 어느 나라의 국왕에도 속박되지 않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템플기사단을 특별히 보호해 주는 칙서를 발표, 세속 법률로부터 면책해 주는 특혜를 내렸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세금을 부과했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도 할 수 있었다. 기사단은 사실상의 국가였던 것이다. 엄격한 규율을 가진 템플기사단은 거짓을 모르는 조직으로서 중세 유럽에서 신뢰도가 높았다. 이를 바탕으로 기사단은 유럽 최초의 금융업자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무역과 순례자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고, 기사단의 여러 지부는 네트워크로 활용됐다. 이들은 예금과 인출 시스템도 만들었다. 예를 들어 기사단의 한 지부에 돈을 예치하고, 예치 증서를 다른 지부에 보여주면 인출이 즉각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심지어 무슬림도 기사단의 은행 서비스를 이용했다고 한다.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기사단은 대부업에도 진출했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7세,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도 거금을 빌려줬다. 게다가 템플기사단은 서유럽과 동방에서 여행자 수표까지 발행했고, 환전 수수료도 챙겼다. 기사단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금융 서비스의 대가로 이들은 각종 특혜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의 몰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성공적인 금융업으로부터 시작됐다. 13~14세기 유럽은 교황의 권위 하락과 왕권이 강해지는 시기였다. 이에 국경을 초월해 만들어진 교황의 템플기사단은 왕들에게 성가신 존재로 다가온다. 게다가 기사단이 가진 엄청난 부와 독자적인 군대는 왕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았다. 결국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의 현금과 금은보화를 뺏기로 결심한다. 기사단은 이단, 우상숭배, 동성애라는 누명이 씌워진 채 기습적으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원은 기사를 포함해 기사단을 보좌하는 이들까지 합쳐 2000명에 달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에게 거의 종속된 관계로 기사단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1314년 3월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단장 자크 드 몰레는 화형대에서 프랑스 왕과 교황에게 “1년 안에 자신과 함께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자”고 소리쳤다. 그의 저주대로 교황과 왕은 지병과 사고로 몇달 후 사망했다. 게다가 필리프 4세의 아들까지도 저주를 받아, 그의 카페 왕조는 7년 뒤 종말을 고했다. 드 몰레의 저주는 이렇게 중세 유럽의 유명한 전설로 남게 된다. 드 몰레와 노르망디의 지역 단장 고네빌이 템플기사단의 빛나는 전통대로 용감하게 죽은 후, 현재까지 기사단은 많은 전설과 음모론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썼다는 ‘성배(Holy Grail)’의 전설과 기사단이 합쳐져, 이들은 성배의 수호자로 묘사되기도 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에서 성배를 지키는 템플기사가 기억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기사단은 700년 전에 해체됐지만 이들은 지하로 잠적하여 지금까지도 은밀한 활동을 한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베일에 가린 조직인 프리메이슨이다. 이들의 기원은 템플기사단이고, 프랑스 혁명의 배후에는 프리메이슨이 있다는 설도 있다. 혁명의 결과로 1793년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프리메이슨 한 명이 “자크 드 몰레, 당신의 원수를 갚았다(Jacques de Molay, you are avenged)”고 외쳤다는 전설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팩트에 기반해 템플기사단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은 어떻게 됐을까? 기사단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언제나 환대받았다. 기사단이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데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특히 포르투갈 왕이었던 디니스는 이들의 공로를 결코 잊지 않았다. 디니스는 1319년 ‘그리스도 기사단(Order of Christ)’을 세웠고, 해체된 템플기사단의 많은 단원들이 이곳에 합류했다. 즉 그리스도 기사단은 본질적으로 템플기사단의 이름만 바꾼 조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포르투갈 국왕에도 복종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사단은 포르투갈의 국익을 위해 일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포르투갈 왕은 왕세자 등을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으로 임명한다. 엔히크 왕자는 기사단의 단장이 된 후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까지 이르는 항로를 최초로 개척했다. 1497년 인도에 도착한 유명한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도 기사단의 단원이었다. 이렇게 대항해시대 때 신대륙을 발견한 포르투갈의 배후에는 템플기사단의 자산이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템플기사단의 십자가로부터 유래된 그리스도 기사단의 문양은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자리 잡는다. 포르투갈의 여러 기관이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포르투갈 축구대표팀도 그중 하나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도 이런 영향을 받아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로고에도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가 들어있다. 공교롭게도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템플기사단의 유산을 물려받은 포르투갈, 브라질과 연달아 맞선 것이다. 따라서 템플기사단의 복장으로 코스프레 할 자격은 프랑스나 잉글랜드가 아닌 포르투갈 팬에 있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4.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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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잉글랜드 팬들이여, 십자군은 당신들과 그리 상관없다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십자군 복장을 한 잉글랜드 팬들은 경기장에 입장할 수 없었다. “십자군 의상은 아랍 세계에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입장 때문이었다. 사실 십자군 코스프레를 한 잉글랜드 팬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이들은 대표팀 경기 때 이런 복장으로 응원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프랑스에서 열린 2016 유로를 앞두고 십자군 의상은 무슬림을 자극할 수 있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이후 온라인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덕분에 더 많은 팬들이 십자군 복장을 할 것이라는 조롱이 BBC에 쏟아졌고, 기사 하단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85%의 팬이 이러한 복장에 문제없다고 답했다. 한 팬은 “북유럽 축구팬의 바이킹 복장이 바이킹에게 약탈당한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 수도사들에게 불쾌함을 준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잉글랜드 팬들의 십자군 의상은 성전기사단(템플기사단, Knights Templar)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성전기사단은 잉글랜드와 크게 연관이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의 중부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탈환하자고 설교했다. 교황의 호소에 감화된 청중은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렇게 십자군 운동은 시작됐다. 1099년 1차 원정을 승리한 십자군은 레반트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해 4개의 십자군 국가(우트르메르)를 세운다. 1차 전쟁은 프랑스 기사들을 주축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십자군 국가의 통치자와 병사들도 대개 프랑스인이었다. 1차 전쟁이 끝난 후 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유럽에서 이주해오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 국가들은 전투 병력이 늘 모자랐고, 이를 틈 타 도적과 무슬림들이 순례자들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프랑스인 기사 9명이 1119년 예루살렘에서 기사수도회를 설립한다. 이들은 수도사들이 하는 청빈순〮결순〮종의 서약과 더불어 적으로부터 순례자들을 보호한다고 맹세했다. 수도사들은 이 조직을 ‘그리스도의 가난한 기사들’로 칭했다. 이러한 기사단에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2세는 자신의 궁전인 성전산의 알아크사 사원을 물려줬다. 이 사원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에 건립된 관계로 솔로몬의 성전으로도 불렸다. 이를 통해 기사단은 성전 및 성전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곧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로 알려졌고, 줄여서 ‘성전기사단’이라고 불리게 된다. 1차 전쟁 이후 반세기 가까이 평화를 누리던 십자군 국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144년 최초의 십자군 국가였던 에데사 백국이 무슬림에게 함락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2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2차 원정은 프랑스와 독일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성전기사단이 이들을 도왔다. 전쟁을 앞두고 교황은 성전기사단에 흰색 상의에 빨간 십자가 문양을 부착할 권리를 부여했다. 비록 2차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성전기사단은 이슬람에 대한 저항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기사단은 후에 잉글랜드를 포함해 서유럽 거의 전 지역에 지부를 가진 국제적인 단체가 되었다. 하지만 성전기사단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인이 중심인 기구였다. 기사단의 200여 년 역사에서 최고 책임자인 단장과 고위급 단원들은 거의 언제나 프랑스인이었다. 잉글랜드는 결코 성전기사단을 비롯해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잉글랜드 축구팬의 십자군 코스프레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십자군을 잉글랜드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됐을까? 잉글랜드의 전쟁영웅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 때문이다. 1187년 살라딘의 무슬림 군대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했다. 충격에 빠진 서유럽은 1190년 3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3차 원정을 이끌었다. 특히 리처드는 필리프 2세가 병을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간 이후에도 살라딘과 맞서 싸웠다. 흥미로운 점은 잉글랜드의 가장 유명한 십자군인 리처드 왕 마저도 사실 프랑스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프랑스어가 모어인 리처드는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리처드는 왕이 된 후에도 잉글랜드에 고작 6개월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리처드는 노르망디 지역과 동방에 설립된 십자군 국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 잉글랜드는 단지 ‘돈줄(cash-cow)’에 불과했다. 잉글랜드의 수호 성인 ‘성 조지’처럼 옷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팬들도 있다. 그러나 성 조지는 4세기 로마제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십자군 복장을 착용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성 조지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조지아, 이디오피아, 카탈루냐 등 많은 지역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축구팬의 성전기사단 혹은 십자군 코스프레는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성전 또는 템플기사단의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와 축구대표팀은 과연 누구일까? 다음 칼럼에서 이에 대해 알아보자.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4.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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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로빈 후드의 영혼이 깃든 클럽, 노팅엄

1990년대에 필자는 영국으로 학부 유학을 하러 갔다. 스포츠가 삶의 낙이었던 필자는 곧 프리미어리그(EPL) 축구, 럭비, 스누커, 크리켓 등 당시 한국에서는 접하기 힘든 새로운 스포츠와 리그에 빠져들었다. 잉글랜드 축구팀의 이름도 흥미로웠다. 특히 필자가 매료된 클럽명이 있었다. 바로 노팅엄 포레스트였다. 국토의 70%가 산악지역인 한국과 달리 잉글랜드에는 지형이 낮은 구릉지대와 평야가 많다. 삼림지대가 국토의 10%에 불과할 정도로, 잉글랜드는 숲도 귀한 나라다. 대신 잔디가 자라기에 최적인 날씨를 가진 덕분에 이 나라에는 잔디밭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깔려 있다. 맨땅을 보기 힘들 정도다. 당시 국내의 열악한 인프라를 생각하며 “우리 축구 선수들도 이런 곳에서 운동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숲(Forest)이 귀한 잉글랜드에서 노팅엄이 이러한 이름을 가진 데에는 흥미로운 스토리가 담겨있다. 노팅엄의 홈구장인 시티 그라운드에서 4.5km 떨어진 곳에는 셔우드 숲(Sherwood Forest)이 있다. 현대 영어에서 포레스트는 삼림 지대를 의미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왕실 사냥 같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법적으로 지정된 땅이라는 의미였다. 역사 전문 채널인 히스토리에서 제작해 인기를 얻은 ‘바이킹스(Vikings)’라는 드라마가 있다. 전설적인 바이킹 군주였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그의 후손들의 활약을 다룬 이 드라마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라그나르의 동생으로 각색돼 나온 롤로(Rollo)다. 전설의 인물일 가능성이 큰 라그나르와 다르게 롤로는 실존 인물이다.9세기 바이킹은 프랑스 파리를 약탈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힌다.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그들을 쫓아냈으나, 바이킹의 약탈은 계속된다. 이에 프랑스의 샤를 3세는 바이킹과 싸우는 대신 이들을 회유하는 조약을 맺는다. 그 결과 당시 바이킹의 지도자였던 롤로는 샤를 3세의 딸인 기셀라 공주와 혼인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북부의 루앙 일대를 하사받아 루앙 백작이 된다. 롤로는 인근으로 지배영역을 넓혀갔고, 이들이 다스린 지역은 ‘노르망디(Normandie, 노르드인의 땅이라는 의미)’라고 불리게 된다. 롤로의 후손들은 세력을 확장하여 공작으로 승격했다. 노르망디 공국은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 세력이었다. 롤로의 고손자인 기욤 2세는 1066년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던 잉글랜드를 정벌하고, 윌리엄 1세가 된다.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설립된 것이다. 현재 영국의 윈저 왕조도 노르만 왕조에 뿌리를 두고 있어, 영국 왕실의 시조는 바이킹이었던 롤로였다. 잉글랜드의 군주가 된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사냥을 즐겼다. 그의 통치하에 잉글랜드에는 왕실 특권 산림법이 등장한다. 이 법은 귀족들의 사냥감이었던 사슴, 노루, 멧돼지와 그들의 서식지인 녹지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따라서 당시 잉글랜드의 포레스트는 군주와 귀족들을 위한 사냥터였고, 셔우드 숲도 그중 하나였다. 셔우드 숲의 중심에는 대형 오크 나무가 있다. 이곳이 바로 전설적인 의적 로빈 후드와 그의 동료들의 본거지였다. 앵글로색슨이었던 로빈 후드는 그의 오른팔 리틀 존과 메리 맨(Merry Men, 유쾌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동료들을 이끌고 노르만 지배층이었던 노팅엄 영주와 부패한 주교 등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 로빈 후드의 정체와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며 다양하게 변형되고 각색되던 이 전설적인 의적 스토리는 15세기에 처음으로 활자화된다. 그 후 문학, 노래, 텔레비전, 영화 등을 통해 로빈 후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등장해 의적의 대명사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1865년 노팅엄의 클린튼 암스라는 이름을 가진 펍에서 신티(shinty, 스코틀랜드에서 하는 필드 하키와 비슷한 경기)선수들이 모여 하키 대신 축구를 하자는 결의를 다진다. 포레스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들이 첫 경기를 중세 셔우드 숲의 일부였던 포레스트 레크레이션 그라운드에서 했기 때문이다. 클럽은 포레스트 그라운드에서 14년 동안 경기를 했다. 하지만 이 곳은 공유지인 관계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입장권 수입이 필요했던 클럽은 여러 축구장을 전전한 끝에 1898년 현재의 홈구장인 시티 그라운드에 자리 잡는다. 노팅엄의 1부리그 우승은 한번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유럽 챔피언을 2번이나 차지한 진귀한 기록도 갖고 있다. 1970~8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클럽은 1999년 EPL에서 강등된 관계로 국내 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클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진에 빠져있던 손흥민 선수가 23년 만에 EPL에 복귀한 노팅엄을 상대로 지난 12일 골을 기록했다. 현재 노팅엄은 강등권에서 아슬하게 벗어나 있고, 이 클럽의 첫 한국인 선수인 황의조는 FC서울로 단기 임대로 와 있다. 황의조 선수가 다음 시즌에는 노팅엄 소속으로 EPL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한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3.1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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