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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리버풀 vs 맨체스터, 축구로 표출된 두 도시의 갈등

18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한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경제와 산업 분야에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심지어 두 도시는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에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 면화를 수입해 부유해진 리버풀은 남부군을 지지했다. 그에 반해 맨체스터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북부연방의 링컨 대통령이 주창한 흑인 노예가 수확한 면화의 금수조치에 공감했다. 면화가 귀해지자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노동자들은 빈곤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연대의 표시로 링컨의 금수조치를 계속 지지했다. 이에 1863년 링컨 대통령은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겨우 56㎞ 떨어져 있는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공통점도 꽤 있다. 두 도시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부, 즉 다른 지역 사람들의 고통 위에 지어졌다. 전통적으로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도시이고, 정치적으로는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을 지지한다. 게다가 두 도시는 훌륭한 축구 전통과 놀라운 음악적 유산도 가졌다. 두 도시의 차이점 또한 상당히 많다. 리버풀보다 규모가 훨씬 큰 맨체스터는 잉글랜드 북부의 수도 같은 도시다. 인종적으로도 맨체스터는 리버풀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대표적인 산업도시인 맨체스터의 공기는 항구도시 리버풀보다 훨씬 오염됐고, 녹지대도 부족하다. 잉글랜드의 ‘쓰레기 수도(litter capital)’라고도 불리는 맨체스터는 2002년 영연방게임의 개최를 앞두고 대대적인 청소를 통해 깨끗한 도시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폐막식이 끝난 후 불과 몇 주 만에 맨체스터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리버풀의 시민들은 삶에 여유가 있고 외향적이며 친절하다. 춥고 우울한 도시 맨체스터의 시민들이 가진 진지하고, 유머가 없으며, 냉소적인 기질과 대비된다. 일하는 도시라는 느낌을 주는 맨체스터와 달리 리버풀은 엔터테인먼트와 쇼핑을 위한 곳이다. 외부인이나 관광객에게는 리버풀이 훨씬 매력적인 곳이다. 맨체스터 사람은 ‘만큐니언(Mancunian)’이라 불리고, 리버풀 사람은 ‘리버퍼들리언(Liverpudlian)’ 또는 ‘스카우서(Scouser)’라고 칭한다. 자동차로 불과 40분 떨어진 두 도시의 만큐니언과 스카우서는 완전히 다른 억양을 구사한다. 맨체스터의 억양은 주변 도시인 리즈, 셰필드와 비슷하다. 반면 리버풀의 스카우스 악센트는 정말 독특하다. 리버풀은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아 ‘아일랜드 제2의 수도(second capital of Ireland)’라고도 불리는데, 스카우스 억양은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015년 10월 BBC는 ‘Wayne Rooney: The Man Behind the Goals(웨인 루니: 골 뒤에 있는 남자)’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다음날 소셜미디어에서 영국인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엄마에게 루니의 악센트를 해석해 주느라고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게다가 “자막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렇게 아일랜드계인 루니의 스카우스 억양은 현지인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 리버풀은 오래전부터 잉글랜드의 외딴섬 같은 지역이었고, 이곳 주민들은 중앙정부와 권위주의에 저항해 왔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할 때 리버풀은 ‘브렉시트’는 맨체스터에나 어울린다면, 자신들은 유럽에 남고 싶어 했다. 심지어 “리버풀은 영국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이들도 있다.경제와 산업 등에서 라이벌인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환경, 문화, 언어 등에서도 이렇게 대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1894년 완공된 ‘맨체스터 선박 운하’는 두 도시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고, 불똥은 축구계로 튀었다. 두 도시의 갈등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리버풀 FC의 경기를 통해 표출될 때가 많다.잉글랜드 1부리그에서 4, 5번째로 우승을 많이 한 클럽도 두 도시에서 나왔다. 에버튼과 맨시티는 각각 9번 우승했으나, 에버튼이 2위를 7번 차지해 6번에 그친 맨시티를 근소하게 앞선다. 라이벌 관계는 기본적으로 두 도시를 대표하는 맨유, 맨시티와 리버풀, 에버튼 사이에 존재한다. 맨유와 리버풀 다음으로 맨시티와 리버풀의 라이벌 전이 유명하다. 리버풀이 역사적으로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통적인 라이벌이 아니다. 2013~14시즌 맨시티가 리버풀을 2점 차로 누르며 우승하면서 신흥 라이벌 관계는 시작됐다. 2010년대 후반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격화됐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맨시티와 리버풀의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와 위르겐 클롭이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뮌헨과 도르트문트에서 경쟁하던 두 감독이 잉글랜드로 나란히 건너와 다시 한번 라이벌이 되면서 언론과 팬의 주목을 끌었다.세 번째로 유명한 라이벌은 맨유와 에버튼이다. 두 클럽의 라이벌 관계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85시즌 에버튼은 리그와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고, FA컵 결승전에도 올랐다. 트레블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연장전까지 치른 결승전에서 에버튼은 10명이 뛴 맨유에 0-1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2005년 FA컵에서 두 클럽이 만났을 때는 약 300명의 서포터스들이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마지막으로 에버튼과 맨시티의 관계는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다. 에버튼은 대부분의 트로피를 1990년 이전에 들어 올린 반면, 맨시티는 2010년 이후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한몫했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8.1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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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축구 유니폼

1998 월드컵이 프랑스에서 열리자, 영국에 있는 한국 축구팬들은 환호했다. 필자도 그 중 하나였다. 필자는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의 첫 경기인 멕시코 전의 티켓을 구했고, 직관 준비에 들어갔다. 가정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대표팀 셔츠였다. 2000년대 들어 한국축구의 성장과 한류의 등장으로 인해 지금은 런던에서 한국대표팀 셔츠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나이키 매장에 가면 자사가 후원하는 잉글랜드, 브라질, 네덜란드 등의 인기 팀과 함께 한국팀의 셔츠도 걸려있다. 심지어 축구전문매장에 가면 태극기도 살 수 있다. 1998 월드컵 한국대표팀의 킷(kit, 스포츠팀의 유니폼) 스폰서도 나이키였다. 하지만 당시 런던에는 한국팀 셔츠를 파는 매장이 없었다. 대표팀의 붉은 셔츠를 구할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굴리던 필자는 결국 대안으로 빨간색이 상징인 리버풀 셔츠를 입었다. 당시 리버풀의 셔츠 스폰서는 덴마크의 맥주회사 칼스버그였다.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고 도버와 칼레를 연결한 채널 터널을 지나 결전 장소인 리옹에 도착했다. 경기가 열리는 프랑스의 명문 클럽 올림피크 리옹의 홈구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한국인이 모여 응원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음 월드컵인 2002 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관계로 국내의 여러 지자체 인사들도 이날 경기장을 찾았다. 수원시 관계자가 당시 필자에게 한마디 한 게 지금도 기억난다. “왜 칼스버그 옷을 입었나요?” 훗날 필자가 국내에서 이 셔츠를 입으면 칼스버그 맥주 판촉 사원으로 오인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축구가 하나의 패션이 되어 응원하는 클럽 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현재의 국내 상황과는 너무 다른 환경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축구 셔츠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여름 필자는 서유럽을 한 달 동안 여행했다. 마침 이탈리아에서는 1990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고, 아시아예선을 수월하게 통과했던 당시 한국대표팀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3패(득점 1, 실점 6)를 기록한 것이다. 한국전쟁 후 열악한 상황에서 출전한 1954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가 유일하게 승점 1도 획득하지 못한 대회였다. 1990 월드컵은 극단적인 수비축구로 진행됐기에 심각한 골 가뭄에 시달렸다. 그러나 흥미로운 스토리로 가득 채워진 대회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돌풍을 처음으로 일으킨 카메룬. 4강에서 만난 서독과 잉글랜드전에서 나온 폴 게시코인의 감동적인 눈물. 잉글랜드의 유명한 PK 실축 징크스가 시작된 대회. 나폴리에서 열린 4강전에서 '나폴리의 신'이었던 마라도나가 시민들에게 그들의 조국인 이탈리아가 아니라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달라고 한 전설적인 얘기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1990 월드컵은 필자가 축구 셔츠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대회이기도 했다. 당시 서독팀의 셔츠를 처음 본 순간 “축구 셔츠가 저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화려하고 다양한 디자인을 가져 패션 아이템으로도 주목받는 현재의 축구 셔츠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전까지의 셔츠는 주로 단조로운 디자인에 단색 위주여서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서독팀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디자인의 셔츠를 들고나온 것이다. 서독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칼라인 흰색에 검정, 빨강, 금색으로 이루어진 국기 색을 창의적으로 조화시켜, 세계인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 필자는 서독대표팀의 셔츠를 사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일정이 빡빡한 패키지 투어여서 개별적인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첫 해외여행이라 어리바리했던 점도 많았다. 일정이 파리를 마지막으로 끝났을 때 필자는 크게 실망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독팀 셔츠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적으로 일정이 바뀌어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귀국 비행기를 타게 됐다. 독일 땅에서는 셔츠를 꼭 살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6시간 대기한다는 말을 듣고, 필자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빠듯해 불안했지만, 마지막 기회였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시내 상점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결국 눈에 아른거리던 유니폼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셔츠는 끝내 못 샀다. 대신 서독팀의 트레이닝복을 샀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독일축구는 그 후에도 준수한 디자인의 셔츠를 계속 출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0년 셔츠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셔츠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셔츠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순위를 객관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럽의 다양한 언론이 여러 번에 걸쳐 발표한 ‘역사상 가장 멋진 축구 셔츠 리스트’에 서독의 1990 월드컵 셔츠는 언제나 최상위권 혹은 1등을 차지한다. "축구는 22명의 남자들이 90분 동안 공을 쫓고, 마지막에는 독일이 이긴다”라는 명언이 있다. 이렇듯 꾸준함과 강함의 상징이 독일축구였다. 그러한 독일이 2018, 2022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연달아 탈락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들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다시 한번 멋진 셔츠를 입고 부활하는 독일축구를 기대하고 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7.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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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리버풀 팬들은 왜 영국 왕실을 싫어할까

지난 6일 영국 런던에서는 찰스 3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70년 만에 열린 영국 왕의 대관식에 많은 세계인과 주요 미디어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관식을 바라보는 영국인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왕실 마차 행렬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버킹엄궁 앞 도로 옆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 영국 경제가 심각한 침체를 겪는 가운데 국민의 세금으로 화려한 행사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컸다. 찰스 3세의 대관식은 프리미어리그(EPL) 스케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토요일 오전 11시에 시작됐다. 시간이 겹치지 않기 위해 그날 오후 12시 30분 킥 오프 예정인 경기는 모두 연기됐다. 영국에는 토요일 오후 2시 45분부터 5시 15분까지 TV나 인터넷으로 축구를 라이브 중계하지 않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이를 ‘축구 블랙아웃(football blackout)’이라고 칭한다. 1960년대 번리(Burnley) 회장 봅 로드가 TV 중계를 하면 축구 팬이 경기장에 오지 않는다는 논리로 탄생시킨 제도다. 공교롭게도 번리는 찰스 3세가 응원하는 클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날만은 블랙아웃 제도가 특별히 유예되어, 팬들은 오후 3시에 시작된 맨체스터 시티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스카이 스포츠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스케줄 변경보다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경기 전 연주된 영국 국가였다. 미국과는 달리 영국은 자국 리그 경기가 열리기 전에 국가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축구장에서 국가는 컵 결승전 또는 국가대항전 때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EPL 사무국은 찰스 3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5월 6일부터 8일(8일 월요일은 영국 공휴일)까지 사흘 동안 리그 경기에 앞서 국가를 연주할 것을 ‘강력히 제안(strongly suggest)’했다. 의무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었지만, 모든 EPL 클럽은 이를 받아들였다. 국가 연주 외에도 첼시, 맨체스터 시티 등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대관식을 축하했다. 특히 토트넘은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대관식을 생중계하는 정성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축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리버풀 팬들은 국가 연주 때 야유를 보냈다. 심지어 ‘F 단어’까지 쓰며 왕실을 욕하는 이도 있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사실 리버풀 팬들이 국가 연주 시에 야유를 보내는 것은 그들의 전통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리버풀은 영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곳이다.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던 리버풀의 특성상 이들은 다른 문화를 자주 접했다. 따라서 이들은 영국의 다른 곳에 비해 문화적 다양성에 훨씬 더 수용적이다. 또한 사회의 엘리트나 지도자층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정치적으로는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을 지지한다. 리버풀은 산업혁명 때부터 영국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도시였고, 한때는 런던보다도 부유했다. 하지만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고 불렸던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수상이 1979년 집권한 이후 이 도시는 빠르게 몰락한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산업 구조의 변화로 리버풀의 전통적인 제조업과 중공업이 쇠퇴하자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졌다. 게다가 컨테이너에 화물을 적재하는 운송이 시작되면서, 도시의 부두(dock, 독)는 구식이 되었다. 이곳의 기존 노동자들 역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1982년 리버풀의 실업률은 17%였다. 영국에서 가장 실업자가 많은 도시가 된 것이다. 지금도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를 방문하는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리버풀 팬들을 가리켜 ‘영구 실업자’라고 조롱한다. 대처 수상은 영국 내에서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대처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녀가 영국의 제조업을 파괴해 산업 전체를 붕괴시켰고, 노동자 계급의 영혼까지 갉아먹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리버풀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피해를 많이 받았기에, 이 도시는 영국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1989년에 일어난 힐스브로 참사(축구장에서 리버풀 팬 94명이 압사하고 766명이 부상당한 사건)는 리버풀 시민을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당시 대처 수상의 영국 정부는 진실을 은폐했고, 참사 원인을 리버풀 팬들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리버풀은 영국의 기득권층에 의해 몰락한 도시다. 그리고 일부 보수 정권의 지도자들은 지금도 이 도시를 폄훼한다. 예를 들어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리버풀이 ‘자기 연민’에 빠진 도시이고 시민들은 ‘피해자 의식’에 젖어 있다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시민들과 리버풀 지역 국회의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끝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영국 국가의 가사를 잠깐 살펴보자. “God save our gracious King! Long live our noble King! Send him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to reign over us(하느님이 우리의 은혜로운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의 고귀한 왕 만세. 그에게 승리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고, 우리 위에 군림하기를 갈망하게 하라)” 이렇듯 국가의 가사는 비민주적이고, 구시대적이며 국가가 지향할 바보다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기득권층으로부터 소외당한 리버풀 시민들은 단순히 유전적인 이유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왕에게 축구장에서마저 충성을 맹세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축구를 보기 위해 안필드에 간 것이지,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축하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축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올 때 비로소 가치 있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5.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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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더 선(The Sun)의 영광과 숙제

필자는 영국에서 17년을 살았다. 한곳에 오래 있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장소에 애증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영국 특유의 칙칙함이 싫은 적도 있었지만, 필자는 요즘 영국이 그립다. 그리움의 대상은 꽤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의 대명사인 더 선(The Sun)이다. 런던에 살 때 아침에 밖에 나가면 꼭 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더 선이었다. 최고의 인기를 얻는 신문을 사긴 쉽지 않았다. 상점 몇 군데를 들러 더 선을 겨우 살 때도 있었고, 아예 못 사는 날도 있었다. 다른 신문들은 쌓여 있는데 더 선만 다 팔린 경우도 많았다. 영국 대학교에는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이 정말 많다. 비(非) 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은 영어도 익힐 겸 영국신문을 자주 보는데, 이들은 꼭 더 타임스나 더 가디언 같은 퀄리티(quality) 신문을 산다. 그에 반해 영국에 꽤 오래 살았던 외국인들은 더 선도 즐겨 본다. 옷차림으로도 특정 사람이 영국에 얼마나 동화됐는지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신문만 봐도 그러한 추측이 가능했다. 더 선은 참 재밌는 신문이었고 가성비도 최고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 가격이 꾸준히 올랐지만, 아무리 비싸도 한국 돈으로 700원 이상 지불한 적이 없다. 더 선은 스포츠, 연예계 뉴스와 더불어 온갖 가십과 스캔들, 그리고 다양한 만화, 독자 고민 상담 코너, 별자리 운세 등 가볍게 읽기에 최적화된 신문이었다. 필자는 더 선을 통해 영국사회나 서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물론 각종 화제성 기사를 특종으로 다루다 보니 더 선이 구설에 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스포츠와 관련된 대표적인 논란을 소개한다. 1989년 4월 15일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인 힐스브로에서 FA컵 준결승전이 열렸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리스트가 맞붙은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리버풀 팬 2만 5000여명이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리버풀 팬 97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는 관중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터진다. ‘힐스브로 참사’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영국 정부는 사고원인을 조사해 ‘테일러 리포트’를 만들었고, 축구장의 안전성과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문제는 당시 더 선이 힐스브로 참사의 원인을 몰지각한 리버풀 팬들의 소동으로 몰아간 것이다. 더 선은 사건 발생 나흘 후 ‘The Truth(진실)’이라는 헤드라인 기사로 리버풀 팬들이 피해자의 몸을 뒤져 귀중품을 훔쳤고, 사고 수습을 하던 경찰관들을 폭행했다는 내용을 특종으로 실었다. 당시 많은 영국인은 더 선의 보도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영국 정부는 재조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사가 터진 지 23년만인 2012년 경기 주최측과 경찰의 잘못이 밝혀졌다. 이에 당시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케머런이 공식 사과했다. 한편 리버풀 시민들은 더 선의 편파적인 보도에 분노했다. ‘The Truth’ 기사가 나오자 하룻밤 사이에 리버풀이 위치한 머지사이드 지역에서 더 선의 판매고는 40% 급락했다. 머지사이드 주민들은 신문을 불태우는 등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계속 벌였고, 2019년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더 선의 판매고는 80% 감소했다고 한다. 머지사이드 주민들이 대신 선택한 신문은 더 선의 1위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경쟁지 데일리 미러였다. 더 선의 자매지로는 일요일에만 발행하는 ‘뉴스 오브 더 월드(News of the World)’가 있었다. 2004년 이 신문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데이비드 베컴이 개인 비서 레베카 루스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특종을 보도했다. 사실 이 기사는 루스가 자신과 베컴의 스토리를 50만 파운드(7억 6000만원)에 뉴스 오브 더 월드에 판매했기에 가능했다. 이렇듯 유명인의 사생활을 타블로이드에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영국에는 꽤 있다. 1843년 퀄리티 신문으로 창간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한때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었다. 1984년 타블로이드로 변신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유명인사나 연예인 특종, 가십 등을 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 신문은 2006년 도청까지 해가며 유명인의 사생활을 캐다 적발되어 곤경에 처한다. 대중의 반발과 기업의 광고 철회가 이어지면서, 2011년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폐간했다. 한국의 스포츠신문과 달리, 영국 대부분의 타블로이드는 정치 성향을 드러낸다. 판매 부수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이 갖는 정치적 영향력도 크다. 더 선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보수당을 지지한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은 더 선의 영향력을 이용해 보수당 정권을 홍보하기도 했다. 더 선은 재치 있는 말장난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어, 2013년 조지 왕자가 태어나자 더 선은 신문명을 ‘The Son’으로 바꿨다.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더 선은 2016년 6월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별 인사인 See you later와 EU를 합친 문장인 ‘See EU Later’를 1면에 싣기도 했다. 영국 최고의 인기 신문인 더 선도 디지털 시대의 파고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다양한 뉴스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더 선을 포함해 영국 종이신문의 판매고는 급격히 줄어든다. 2011년 더 선의 하루 발행 부수는 300만이었으나, 2018년에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결국 더 선은 40년 동안 지켜오던 최고 인기 신문의 자리를 2018년 무료 신문인 메트로(Metro)에 내줬다. 더 선은 2020년 125만부를 기록한 이후 발행 부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퀼리티 신문인 더 타임스(37만부)와 더 가디언(11만부)도 2020~21년을 마지막으로 발행 부수 보도를 중단했다. 종이 신문은 결국 디지털화할 것이다. 스포츠신문도 팩트만 보도해서는 디지털 시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간단한 팩트를 보도하거나 외신을 번역만 한 기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사건을 비판적으로 분석, 해석하고, 차별화된 콘텐츠를 가진 신문만이 앞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0.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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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첼로티, 가족 리더십으로 9번 역전승…클롭도 꺾을까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와 리버풀(잉글랜드)이 29일 오전 4시(한국시각) 프랑스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리는 2021~22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에서 맞붙는다. 카를로 안첼로티(63·이탈리아)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을 이끈다면 밥 페이즐리, 지네딘 지단을 제치고 ‘UCL 역대 최다’(4회) 우승 지도자’가 된다. JTBC 프로그램 ‘비정상 회담’에 출연했던 알베르토 몬디(38)가 같은 이탈리아 출신 안첼로티 감독의 리더십을 분석했다. 알베르토는 21세까지 세리에D(4부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다. 카를로 안첼로티는 별명이 두 개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만뇨(Carlo Magno)’라 불린다. ‘대왕’이라는 의미다. 안첼로티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많은 우승을 이뤄내 ‘왕’ 대접을 받는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레또(Carletto)’라 불린다. ‘etto’는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부를 때 주로 쓰인다. 농부 출신 아버지를 둔 안첼로티는 볼이 빨갛고 성격이 얌전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통통한 안첼로티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안첼로티는 트레이드 마크인 ‘눈썹’을 움직이며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선수 때도 동료에게 소리 지르기 보다는 얼굴이나 표정으로 말했다. AC밀란 선수 시절 UCL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에서 두 차례(1989, 1990년) 우승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플레이메이커로 뛰면서 ‘알레나토레 인 캄포’(Allenatore in campo·그라운드의 감독)라 불렸다. 안드레아 피를로(이탈리아)나 조르지뉴(브라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안첼로티는 ‘카테나치오(빗장수비)’의 종말을 고하고, 현대 축구를 창시한 아리고 사키(이탈리아)의 제자다. 사키는 리베로 역할을 없앴다. 라인을 끌어올려 간격을 촘촘하게 하고, 프레싱을 강력하게 펼쳤다. 사키는 1994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 대표팀 수석코치로 ‘축구 이해도가 뛰어난’ 안첼로티를 데려갔다. 안첼로티는 파르마와 유벤투스 감독 시절 사키의 4-4-2 전술을 똑같이 구사했다. 이후 AC밀란를 맡아 안첼로티만의 4-3-2-1 포메이션, 이른바 ‘크리스마스 트리 전술’로 두 차례 챔스리그 우승(2003, 2007)을 이뤄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포백 앞에 카세미루(브라질)를 배치해 양쪽 풀백이 공격에 가담하게 한다. 전 세계에서 명장 대우를 받는 안첼로티지만, ‘아빠 찬스’ 논란이 있다. 아들 다비데 안첼로티(33)를 레알 마드리드 코치로 앉혔기 때문이다. 2013년에는 사위를 구단 영양사로 채용한 적도 있다. 낙하산 논란과 함께 ‘이탈리아의 족벌주의’라는 비난도 받는다. 가족을 중시하는 안첼로티는 선수단을 가족 같은 분위기로 이끈다. 레알 마드리드는 올 시즌 9차례 역전승을 거뒀다. 선수들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면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 영어·스페인어·독일어 등을 구사하는 안첼로티 감독은 선수를 어떻게 찔러야 좋은 반응이 나오는지 잘 안다. 안첼로티의 성공은 운 덕분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가 부드러운 리더십을 앞세운 ‘덕장’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새로 입단한 선수에게 동료들 앞에서 노래를 시키는 문화가 있다. 안첼로티가 파르마 감독 시절 시작한 것이다. 안첼로티는 감독으로서 다섯번째 UCL 결승 무대를 밟는다. 지도자로서 역대 최다 기록이다. 총 4차례의 결승전 중 세 번이나 ‘빅 이어(UCL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05년 AC밀란을 이끌고 리버풀에 3-0으로 앞서다가 3-3 동점을 내주고, 승부차기 끝에 진 게 유일한 패배다. 2018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서 리버풀을 꺾었다. 역대 챔스리그 우승 횟수는 레알 마드리드(13회), AC밀란(7회), 리버풀(6회) 순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시민들은 리버풀이 AC밀란과 동률(7회)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첼로티, 제발 이겨달라”고 응원한다. 이탈리아 성인인 파드레 피오 신부 사진을 늘 품고 다니는 안첼로티는 ‘터치라인 댄서’라 불리는 위르겐 클롭(55·독일) 리버풀 감독과 지략싸움을 펼친다. 클롭은 도르트문트 감독 시절 헤비메탈처럼 격렬한 게겐 프레싱(전방압박)을 펼쳤다. 리버풀에서는 유연하고, 실리적인 축구도 추구한다. 리버풀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30·이집트)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그는 4년 전의 복수를 하고 싶을 것이다. 살라는 2018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UCL 결승에서 어깨를 다쳤다. 전반에 교체 아웃되면서 눈물을 흘렸다. 손흥민(토트넘)과 득점왕 경쟁을 펼치던 살라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도 건너 뛰면서 칼을 갈고 있다. 발롱도르가 유력한 레알 마드리드 공격수 카림 벤제마(35·프랑스)와의 맞대결도 관심을 끈다. UCL 득점 선두(15골)인 벤제마에겐 마지막 UCL 결승전이 될 수도 있어 각오가 남다를거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2022.05.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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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서 손흥민 못 봐? ‘슈퍼리그’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 점입가경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12개 팀이 지난 19일(한국시간) ‘유러피언 슈퍼리그(ESL)’ 창설을 선언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6개팀(리버풀, 맨시티, 맨유, 아스널, 첼시, 토트넘)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3개팀(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그리고 이탈리아 세리에A 3개팀(유벤투스, 인터밀란, AC밀란)이 먼저 슈퍼리그 참가 의사를 밝혔다. ESL은 추가로 참가팀을 모아(창설 멤버 15개팀+5개팀) 2022~23시즌에 대회를 시작하는 게 목표다. 이럴 경우 유럽의 클럽 대항전을 주관하는 유럽축구연맹(UEFA)의 기득권은 돈 앞에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UEFA는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고, 가능한 모든 징계 수단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1월 슈퍼리그 창설 소문이 돌았을 때, UEFA의 상위기관인 국제축구연맹(FIFA)은 ‘FIFA가 승인하지 않은 대회에 참가하는 팀과 소속 선수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따라 FIFA는 ESL에 참가하는 팀의 소속 선수들은 FIFA 월드컵 참가 금지 징계를 주겠다고 했다. 만일 ESL 시작 시기가 빨라지면 손흥민(토트넘)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벌써부터 외신에는 ‘월드컵 불참 징계를 받는 선수들을 제외하고 꾸린 나라별 베스트11’ 같은 뉴스가 등장하고 있다. ━ 빅 클럽들 ‘내가 번 돈, 내가 더 가져간다’ 유럽 축구는 우승 경쟁을 벌이는 빅 클럽들과 1부에서 버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중소 클럽들로 확연하게 나뉜다. 빅 클럽들이 리그 수익의 80% 가까이 벌어들이지만 중계권료 등의 수익은 1부리그의 모든 클럽이 나눠갖는다. ESL은 이러한 빅클럽의 가려운 부분을 파고들었다. ‘많이 버는 팀이니 많이 가져가라’는 것이다. 영국 ‘인디펜던트’ 보도에 따르면 ESL은 참가하는 15개팀에 참가비 만으로 총 35억 유로를 푼다. 팀당 약 2억3000만 유로(3130억원)를 가져갈 수 있다. 물론 3000억원 이상의 우승 상금과 성적에 따라 차등지급되는 돈은 별도다. 현재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상금이 1900만 유로(254억원)다. 중계권료 및 참가 수당을 합해도 우승팀이 가져가는 돈의 총액이 8200만 유로(1096억원) 수준이라서 ESL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빅 클럽 입장에서는 강등 걱정 없이 큰 돈을 보장 받는 게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코로나19로 최근 빅 클럽들의 재정이 어려워진 것도 ESL 참가 의사를 굳히는데 한몫 했다. ESL 참가팀에 주는 돈은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이 끌어온 투자금을 배분한다. 벌써부터 넷플릭스, 아마존 등 OTT 서비스가 천문학적인 독점 중계권을 사들일 거라는 루머가 돌고 있다. 추가 스폰서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 UEFA+유럽 축구팬 “그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토트넘의 팬 페이지 ‘스퍼스 웹’은 19일 칼럼에서 “다니엘 레비(토트넘의 CEO)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썼다. 유럽 현지의 반응은 인기 클럽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게 이기적이고 정통성을 해치는 돌발 행동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각 리그는 빅 클럽에서 나오는 낙수 효과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을 함께 배분하면서 대다수의 팀들이 유스 시스템과 여자축구 팀을 함께 운영할 수 있었다. 만일 빅 클럽들이 이를 원천봉쇄하고 수익을 독점할 경우 전체적인 인프라에 악영향을 미친다. 또한 창설 멤버 15개팀은 영원히 강등되지 않도록 하는 ESL의 폐쇄적인 운영이 ‘강등제’라는 유럽 축구의 본질을 해친다는 의견도 많다. 유럽의 명문 클럽들이 승강제가 없는 미국식 시스템 안에서, 미국 자본력에 의해 경기를 한다는 점도 유럽 팬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 축구 스타 출신 해설자 게리 네빌은 “150년간 쌓아온 잉글랜드 축구의 피라미드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일”이라며 프리미어리그의 6개 참가팀에 중징계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축구 서포터즈 모임인 ‘팬스 유럽’은 “슈퍼리그는 불법이고 무책임하며 반 경쟁적”이라고 성명을 냈다. FIFA는 홈페이지에 공식 입장을 전하면서 “연대, 포용, 진실성, 공평한 이익의 분배는 축구의 본질”이라며 “이러한 본질을 뒤흔드는 ‘폐쇄적인 탈 유럽 리그’를 승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 역시 ESL 출범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 입장에서 가능한 조치를 모두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영국에서 축구를 즐기는데 해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ESL 측은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과 알렉산드르 제페린 UEFA 회장에게 서한을 보내 FIFA와 UEFA가 자신들이 약속 받은 자금 지원을 위태롭게 하는 징계를 이어갈 경우 법적인 대응을 한다고 밝혔다. 새로운 자본의 논리냐, 정통 유럽 축구의 기득권이냐를 두고 ESL 출범의 여진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은경 기자 2021.04.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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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축구를 계속한 이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2020년, 유럽에서 유일하게 축구리그를 중단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벨라루스였다. 벨라루스의 대통령 루카셴코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정신병’이라 칭했다. 그는 보드카와 사우나가 코로나19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모든 축구리그가 중단되는 바람에 벨라루스 리그는 한때 전 유럽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현지인은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축구장 방문을 자제했다. 벨라루스를 제외한 유럽 축구는 2020년 3월 중단되었다.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EPL)도 3월 13일 리그를 멈춰 세웠다. 이에 많은 언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유럽에서 축구가 중단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록 정상적인 리그는 아니었지만, 전쟁 중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잉글랜드에서 축구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전쟁 중에도 축구를 왜 계속했을까?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후인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2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영불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전면적인 충돌은 거의 없었다. 주력부대를 폴란드 침공에 투입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영불 연합군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면전을 우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서부전선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기묘한 고요'는 1940년 5월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을 전쟁답지 않은 전쟁이라 하여 흔히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 부른다. 영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영국축구협회는 풋볼 리그와 FA컵을 중단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전쟁이라는 공포 속에서도 축구가 민간인과 군인 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간주해, 경기가 계속 열리길 희망했다. 이에 중단된 풋볼 리그를 대신해 전시 리그(Wartime League)가 창설되었다. 전시 리그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경기당 50마일(약 80㎞)의 이동제한을 받았다. 이에 풋볼 리그는 1·2·3·4부 리그로 나눈 디비전 구성을 폐지하고, 지역별 리그를 새로 구성했다. 전시 리그의 첫 시즌인 1939~40년 풋볼 리그에 속했던 82개의 클럽은 10개의 지역 리그로 분배되었다. 아울러 전시 리그 초반에는 경기당 8000명의 관중만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원 제한이 무의미할 정도로 초반의 경기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베네룩스 3국을 점령하고,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가짜 전쟁'은 막을 내렸다. 6월 프랑스의 덩케르크에서 30만이 넘는 영불 연합군은 거의 모든 군수 물자를 버리고 간신히 탈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격화할수록 전시 리그의 인기는 올라갔다. 경기당 관중 수 제한도 해제되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1940년 6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풋볼 리그 전쟁 컵(Football League War Cup, 전시에 FA컵을 대신한 대회) 결승전에는 4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모였다. 특히 며칠 전 덩케르크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상당수의 군인도 이 경기를 관전하면서 영국 국민에게 희망을 전해주었다. 히틀러는 “독일은 나폴레옹이 가지지 못했던 공군이 있다”며 영국 침략에 자신감을 보였다. 독일 공군은 1940년 9월부터 영국의 주요 도시와 산업시설을 공격하는 영국 대공습(The Blitz)을 감행했다. 하지만 처칠의 영국 정부는 대공습이 시작된 이후 일요일 축구 금지령을 도리어 해제했다. 축구를 통해 국민의 사기 진작에 나선 것이다. 1941년 열린 풋볼 리그 전쟁 컵 결승전에는 대공습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6만 명이 넘는 관중이 웸블리에 모였다. 결국 1941년 5월 독일 공군의 대공습은 실패로 끝이 났다. 히틀러는 영국 상륙작전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관심을 돌렸다. 영국에서는 전시 기간 총 784명의 프로 축구 선수들이 군에 입대했다. 참전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클럽은 울버햄튼(91명 입대)이었고, 리버풀(76명 입대)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리그는 ‘초청 선수’라는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그래도 클럽들은 여전히 선수들이 부족했고, 많은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시 리그의 경기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무적의 팀도 없었고, 중요한 라이벌전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90분 동안만이라도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인생을 다시 한번 즐기기 위해 축구장을 방문했다. 전쟁 중에 영국만 축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에서도 축구는 중단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심지어 항복 선언을 하기 보름 전에도 경기를 벌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감자 등을 경기장 티켓과 바꿔 축구장에 갔다.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중에도 축구는 유럽에서 중단되지 않았다. 따라서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사실상 모든 유럽 프로 축구가 폐쇄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21년 1월 현재 바이러스가 다시 극성을 부리며 리그 중단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은 리그를 쉽게 중단하지 않는 이유로 TV 중계권료 등 경제적인 이유를 꼽는다. 하지만 리그를 중단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전시 리그가 그랬듯이 코로나19로 지친 우리에게 축구는 평소보다 더 중요한 걸 제공하고 있다. 바로 희망이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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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엠, WHO 온라인 캠페인 참여…K팝 아티스트 유일

그룹 SuperM(슈퍼엠)이 전 세계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이하 WHO)와 함께 나선다. SuperM은 10일 ‘세계 정신건강의 날’(World Mental Health Day)을 맞이하여 WHO에서 주최하는 온라인 이벤트 ‘The Big Event for Mental Health’에 K팝 아티스트로서 유일하게 참여한다. ‘The Big Event for Mental Health’는 정신건강의 중요성과 관리 방법에 대해 널리 알리고 모두에게 정신건강 프로그램이 제공되도록 독려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마틸드 필립 벨기에 왕비(Queen Mathilde), 엡시 캄프벨 바르(Epsy Campbell Barr) 코스타리카 제1부통령, 영국 리버풀 FC의 골키퍼 알리송 베커(Alisson Becker), 나이지리아의 싱어송라이터 코리드 벨로(Korede Bello) 등 세계 지도자 및 글로벌 유명인사들이 출연한다. SuperM은 첫 정규앨범 앨범 수록곡 중 따뜻한 보컬이 돋보이는 ‘Better Days’(베터 데이즈)를 선보이며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응원과 힐링의 퍼포먼스를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이벤트는 10일 오후 11시(10AM EST)부터 WHO의 웹사이트 및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LinkedIn, 틱톡, Twitch의 WHO 계정을 통해 방송되어 전 세계인의 뜨거운 관심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황지영기자 hwang.jeeyoung@jtbc.co.kr 2020.10.0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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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축구팬이 펍(pub)에서 즐기는 법①

해마다 많은 한국인들이 영국을 방문했다. 특히 축구팬들은 여행도 하고,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현장에서 즐길 목적으로 영국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다시 많은 여행객이 영국을 찾을 것이다. 그들 을 위해 영국 펍(pub)에서 생존하는 법을 소개한다. 영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펍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다. 펍은 그들의 삶과 깊숙이 연결돼 있고, 동네 사랑방 같은 기능을 한다. 보통 오전 11시에 열어 밤 11시에 문을 닫는 펍에서 영국인들은 지인과 대화하고 식사하며, 휴식을 취한다. 한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운영중인 펍도 매우 많고, 심지어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펍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로 치면 조선 시대에 세워진 주막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펍은 영국 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조지 오웰 같은 세계적인 문학가들은 펍에서 집필 활동을 하거나, 사색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연구하며 『자본론』 등을 집필한 칼 마르크스도 펍 애호가였다. 애주가였던 그는 옥스퍼드 스트리트와 토트넘 코트 로드의 많은 펍에서 시민들과 논쟁을 즐기곤 했다. 리버풀 출신의 밴드 비틀즈도 공연 후에 자신들의 아지트인 펍에 들러 맥주로 목을 축였다. 영국 문화와 일상을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펍을 방문해보자. 특히 축구팬이라면더욱더 펍을 가야 한다. 왜 그럴까. 2019~20시즌 프리미어리그 경기장 관중의 약 75%는 시즌 티켓 보유자였다. 따라서 일반 팬이나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25% 남은 티켓을 사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이러다 보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아스널 같은 유명 팀들 간의 경기 티켓을 구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돈도 많이 든다.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보고 싶다면, 토트넘과 비 인기팀의 경기 티켓을 노리는 게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쉽지 않다. 여러분이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에 토트넘이 홈에서 비인기 팀과 경기를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트넘 경기 스케줄과 여행 일정을 맞춰야 한다. 축구장 입장권도 사전에 구입해야 한다. 모든 팬이 이렇게 계획적이지는 않다. 런던까지 갔는데, 토트넘 경기를 직접 못 본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팬도 있을 것이다. 경기장에는 못 들어가도 가장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기 좋은 방법은 바로 펍에 가는 것이다. 보통 펍에는 특정한 드레스 코드가 없다. 하지만 도심에 있는 펍이나 멋쟁이들이 넘쳐나는 곳에는 저녁 시간대에 입구에 덩치가 좋은 ‘기도’들이 서 있다. 바운서(bouncer)라고 불리는 이들을 보면 주눅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당당히 들어가라. 물론 이런 경우에는 제대로 차려입어야 한다. 아웃도어, 청바지, 운동화, 짧은 바지 등을 입으면 입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으니 여권도 준비하자. 아마 여러분은 런던에 도착해 손흥민 선수 이름이 새겨진 토트넘 셔츠를 살 것이다. 흥분한 나머지 계속 그 옷만 입고 다닐 수도 있다. 펍에서는 축구 팬도 클럽 셔츠를 입는 경우가 드물다. 운이 나쁘다면 아스널 등 다른 클럽의 팬들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 이 같은 이유로 펍의 위치도 중요하다. 아스널 구장 근처의 펍에 토트넘 셔츠를 입고 들어가면 안 된다. 또한 토트넘 셔츠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관광객으로 보일 것이다. 관광객은 티가 안 날 수가 없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게 좋다. 펍에 막상 들어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울 수 있다. 앉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가서 앉을 것이다. 하지만 펍은 바에서 주문해야 한다. 테이블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물 한 잔 마실 수 없다. 주문하기 위해 바에 가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만약에 바텐더가 한가롭게 있다면 “excuse me(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주문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하고 있는 바텐더를 부르거나 손짓을 하면, 다른 사람의 차례를 가로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 “기다리라”는 다소 냉정한 말을 들을 것이다. 아니면 바텐더가 고의로 여러분을 더 기다리게 할 수도 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바쁜 시간의 바에는 바텐더가 머릿속에 생각하는 순서가 있다. 따라서 바에 가면 바텐더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그리고 좀 기다리다 보면 바텐더가 다가와서 주문을 받는다. ‘고객은 왕’이라는 생각은 절대 가지면 안 된다. 펍은 다양한 음료를 판매한다.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는 역시 맥주다. 병맥주보다 맛이 더 좋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맥주(draught beer)를 사람들은 주로 마신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맥주를 달라고 하면 여러분이 식당에 가서 “아무 음식이나 주세요”라는 말과 같은 황당한 주문이 된다. 펍에는 기본적으로 라거(lager), 에일(ale)과 스타우트(stout) 등 세 가지 종류의 맥주를 서빙한다. 라거는 하면발효방식으로 생산하여 저온에서 일정기간 숙성시킨 맥주를 말한다. 국내에서 전통적으로 마셔온 맥주가 바로 라거다. 라거는 다시 페일(pale), 앰버(amber)와 다크(dark)로나누어진다. 세계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는 페일 라거다.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라거는 현재 잉글랜드 맥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사랑받는 맥주는 에일이었다. 상면발효방식으로 생산되며 색이 짙고 쓴 냄새가 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에일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페일 에일에 속하는 비터(bitter)는 20세기에 들어 큰 인기를 얻으며 ‘잉글랜드의 국민 음료 (the national drink of England)’로 불렸다. 쓴맛이 나고 썹씨 11~14 온도로 서빙되는 비터에 한국인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몇 번 마시다 보면 비터만 찾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정우 경영학 박사(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0.09.21 06:00
축구

한 손엔 레드삭스, 다른 손엔 리버풀…둘 다 끝장 본 사나이

세계 최고의 야구팀과 축구 클럽을 동시에 소유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있는 일이다.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 보스턴 레드삭스와 2018~19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오른 리버풀(잉글랜드) 구단주 존 헨리(70)가 그 주인공이다. 보스턴은 지난해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LA 다저스를 시리즈 전적 4승1패로 꺾고 우승했다. 이어 지난 2일에는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토트넘 홋스퍼(잉글랜드)를 2-0으로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다. 보스턴과 리버풀을 운영하는 FSG(펜웨이 스포츠 그룹)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헨리는 7개월 사이 두 개의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헨리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인 미국 일리노이주 퀸시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콩 농사를 지었다. 록스타가 꿈이었던 그는 아버지 농장을 물려받은 뒤, 농산물 거래 사업을 시작했다. 31살에는 금융업에도 뛰어들었다. 사업은 성공했고 부자가 됐다. 그는 보스턴 최대 미디어 그룹인 보스턴 글로브도 인수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헨리의 추정 자산은 27억 달러(약 3조2000억원·세계 838위)이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헨리는 1999년 MLB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를 사들였다. 헨리는 비인기 구단이던 플로리다 운영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2002년 마이애미를 처분하고, 보스턴을 매입했다. 헨리의 구단주로서 성공 비결은 인재 영입이다. 2003시즌을 앞두고 오클랜드에서 ‘머니볼’로 성공했던 빌리 빈을 단장으로 영입하려 했다. 실패하자 대신 테오 엡스타인을 단장으로 데려왔다. 당시 만 28세였던 엡스타인은 로스쿨 졸업 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잠깐 일한 게 전부다. 엡스타인은 좋은 선수를 효율적으로 영입했다. 보스턴은 그해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듬해인 2004년 고액 선수까지 영입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헨리와 엡스타인이 1918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치운 뒤 우승하지 못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86년 만에 풀었다. 보스턴에서 성공을 거둔 헨리는 2010년 4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리버풀을 3억 파운드(약 4500억원)에 인수했다. 리버풀도 보스턴과 비슷한 처지였다. 전통의 명문이지만 근래 부진했고, 재정 상태도 나빴다. 미국인이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구단을 소유한 데 대한 차가운 시선도 있었다. 인수 뒤 두 번째 시즌에 프리미어리그 2위를 차지했지만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걸핏하면 매각설이 나돌았다. 이번에도 헨리는 ‘사람’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2015~16시즌을 앞두고 위르겐 클롭(독일·52) 감독을 영입했다. 헨리는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에서 성공을 거둔 클롭에게 전권을 맡겼다. 클롭은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는 등 자신의 축구 철학에 맞춰 팀을 개편했다. 사디오 마네(세네갈), 모하메드 살라(이집트), 버질 반 다이크(네덜란드) 등이 클롭 작품이다. 클롭은 이들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리버풀 구단주 헨리에게는 남은 숙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이다. 리버풀은 1992년, 현재의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래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마지막 우승이 프리미어리그 출범 전인 1989~90시즌이다. 올 시즌엔 30승7무1패(승점 97점)로 선전하고도, 맨체스터시티(승점 98점)에 우승을 내줬다. 헨리는 “(2022년까지 계약 기간인) 클롭과 연장계약을 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번 여름 이적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쓸 것”이라고 밝혔다. 온라인 일간스포츠 2019.06.0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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