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창간특집] '어펜저스' 김정환-오상욱, 13년 차이 '세대차 선후배'의 금빛 토크
도쿄올림픽은 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세계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한 무대였다. 명승부 끝에 금메달을 딴 김정환(37), 구본길(32), 김준호(27), 오상욱(25)은 귀국과 동시에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의 러브콜을 받았고, 그 사이 두 차례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한 국내 대회에 나가 1~3위를 휩쓸었다. 실력과 외모, 인기를 모두 갖춘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다. 이들 중 맏형 김정환과 막내 오상욱이 일간스포츠 창간 5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뭉쳤다. 둘의 나이는 13세 차. 김정환은 "여전히 종이로 된 신문을 펼쳐 기사를 보는 게 편한" 오프라인 세대다. "실제로 집에서 오랫동안 일간스포츠를 구독했다"는 애독자 출신이다. 오상욱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기사를 보기 시작한" 온라인 세대다. 신문에 찍힌 활자보다 디지털 콘텐트에 익숙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이의 간극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놀리며 장난을 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 못지않은 '티키타카'였다. 그러다 펜싱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을 때는 나란히 눈빛부터 진지해졌다. 1시간 30분에 걸친 인터뷰와 사진 촬영 내내, 매 순간 진심을 다한 맏형과 막내. 그들의 창간 기념 토크를 생생하게 옮겼다. 대화는 비인기 종목의 벽을 넘어 전국적 인기인이 된 이들의 유명세 얘기로 시작됐다. -유명인이 된 기분은 어떤가요. 김정환(이하 김)=처음엔 실감을 못 하다가, 공공장소에서 많은 분이 알아보시는 걸 보고 '우리가 좀 유명해졌구나' 실감하고 있어요. 최근에 백화점에 갔는데 모자랑 마스크를 썼는데도 많은 분이 알아보시더라고요. 오상욱(이하 오)=저도 백화점에 갈 때나 동네를 돌아다니거나 할 때, 많이 알아보고 인사하셔서 신기해요. 기분이 좋으면서 한편으로는 '앞으로 진짜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두 분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글과 사진이 기사화되잖아요. 아내와 여자친구도 함께 화제에 오르고요. 김=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올린 인스타 게시물이 금세 기사로 나오다니! 올림픽 전엔 기사는커녕 SNS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됐거든요. 지금은 3만3000명이 넘었어요. 엄청난 성장률이죠. 오=저도 기사에서 제 이름 앞에 여자친구(펜싱 플뢰레 선수 홍효진) 이름이 뜨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정환이 ‘진짜야?’라고 묻자) 진짜예요. 제 기사를 클릭했는데 바로 여자친구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김=그래서 제가 늘 '여자친구한테 잘해주라'고 해요.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상욱이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인식할 거잖아요. 그 전의 '원래 오상욱'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농담 삼아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순수한 유기농 사랑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효진이에게 잘해'라고 했어요. 지금 여자친구가 참 착하고, 상욱이에게 잘 맞춰주거든요. 오=여자들이 별로 안 좋아할 만한 걸 같이 하자고 해도 잘 해주죠. 김=저희가 다같이 낚시를 간 적이 있어요. 낚시가 처음인 여자분들은 지루할 수 있는데, 10시간 가까이 상욱이 취미를 함께해주는 걸 보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오=지금은 오히려 먼저 '가고 싶다'고도 해요. 다만 제가 여자친구 언급을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얼마 전 여자친구 휴대전화를 같이 보고 있었는데, SNS로 쉴 새 없이 욕설이 오더라고요. -유명세의 그림자네요. 오=그런 것 같아요. 사진도, 글도 없는 유령 아이디들이 계속 욕을 보내요. 그래서 지금 여자친구가 SNS 댓글을 막았어요. 김=저에게도 그런 게 와요. 제가 JTBC '아는 형님'에서 김희철 씨와 '전주 1초 듣고 노래 제목 맞히기' 대결을 해서 이겼는데, 어떤 사람이 '너무 좋아하지 말아라. 김희철이 당신을 띄워주려고 져준 것이니 고마워해라'라고 보냈더라고요. 저 희철이랑 친한데, 정말 진 게 맞거든요.(웃음) 어이가 없어서 그냥 답장을 안 했어요.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오상욱 선수가 펜싱 칼로 침대 밑에 떨어진 물건을 꺼내는 걸 봤어요. 그 외에 펜싱 칼로 해본 신박한 일은 뭐가 있나요. 김=저는 방에서 불을 끌 때 써요. (일동 폭소) 칼 끝으로 스위치를 터치하는데, 너무 세게 때리면 버튼이 부서지거든요. 우리는 포인트랑 파워 조절이 자유자재니까 멀리서 칼을 뻗어서 탁 켜고, 탁 끄고 하죠. 오=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진짜예요. 체육관에 펜싱 칼 들고 나갈 때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칼끝으로 눌러요. 김=칼끝으로 '닫힘', '지하 1층' 버튼 눌러서 내려가는 거죠.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힐 것 같아서 급할 때는 런지(다리를 앞으로 최대한 뻗는 동작)로 막지만, 평소에는 발레스트라(앞쪽으로 짧게 점프하는 풋워크) 정도로 들어가면 충분합니다. -일상생활에 펜싱이 녹아 있네요. 김=제가 일상생활과 펜싱을 접목해 후배들에게 조언하기 시작한 개척자예요.(웃음) 예를 들어 운전하다 교차로에 진입했을 때, 노란불이 켜지면 그냥 빨리 지나가는 게 안전하잖아요. 그런데 상욱이는 브레이크를 밟아요. 그럴 때 '이건 펜싱이랑 똑같다. 점수를 내서 치고 올라가야 할 때 막히는 거라고 보면 된다'고 얘기하죠.(웃음) 상욱이가 실력은 정말 출중한데, 아직 게임운영이나 전술이 조금 부족해요. 상대가 치고 나갈 때 땀을 닦는 척하면서 맥을 끊거나 하는 요령이 필요하거든요. 선수촌 룸메이트로 생활하면서 이런 부분을 계속 얘기하고 있어요. -서로 첫인상은 어땠나요. 김=상욱이가 고3 때였는데,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고요. '오상욱이라고 봤어? 원우영 선수랑 오은석 선수를 이겼대' 하면서요. 사실 괴물 루키가 태어날 때의 분위기는 매번 비슷해요. 구본길 때도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떤 선수인지 보고 싶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상욱이를 모르고 방심하다 졌다면, 저는 얘기도 들은 것도 있고 어린 선수들의 게임 방식도 잘 아니까 처음엔 크게 이겼죠. 그러다 상욱이가 국가대표로 뽑혀서 저랑 방을 같이 쓰게 된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니 펜싱에 욕심이 많고, 틈날 때마다 펜싱 영상을 보더라고요. 제 영상도 많이 보고.(웃음) 오=전 처음엔 형이 정말 차가워 보였어요. 그때 형 성격이 그랬던 건 아닌데, 저희 같은 후배들이 멀리서 봤을 때는 그랬어요. 형이 경기장에서는 워낙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말을 잘 안 하니까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김=후배들은 저를 어려워했던 게 사실이죠. 상욱이는 나중에 룸메이트가 돼서 저의 본모습을 많이 봤고요. -오상욱에게는 김정환 선배와의 친분이 자랑거리였겠네요. 오=저도 처음엔 정환이 형과 방을 같이 쓰게 돼서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요. 그런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때 경기장에 나가면 정환이형 덕에 제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어요. 다른 친구들이 형한테 인사했을 때 '그래, 잘 있었어?'라고 아는 척만 해줘도 다들 기뻐하던 시절이거든요. 그런데 형이 저한테 친근하게 대해주니까 주변 동기들이 부러워하더라고요. 제가 기가 많이 살았죠. 김=제 입장에선 상욱이가 틈날 때마다 질문을 많이 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이 타이밍에 이런 생각을 할 땐 무슨 생각이셨어요?' 같은 질문을 하더라고요. 펜싱에 열정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친구는 내가 도움을 주면 그걸 극대화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제 경험의 농축액을 떠먹여 줬죠. -후배의 시행착오를 줄여준 거군요. 김=헛된 시간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사브르가 이렇게 강해지기 전부터 여러 길을 가봐서 '어떤 길이 옳다'는 답안지를 갖고 있잖아요. 수많은 경험 중 내가 해보면서 후회됐던 건 거르고, 좋은 것만 알려주려고 했어요. 펜싱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요. 오=저한테 진짜 도움이 많이 됐죠. 예전부터 제가 늘 '김정환 선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이유가 있어요. 김=사실 처음에는 성장 속도가 생각보다 더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팍' 하고 터지면서 진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더라고요. 그때 저도 조금 보람을 느꼈고, 대견하기도 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상욱이의 지금 나이와 시절이 부럽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는 때가 올 텐데, 그때 잘 내려오는 방법도 나중에 알려주고 싶네요. -두 선수 스타일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김=공룡으로 치면 저는 육식 공룡 티라노 사우르스, 상욱이는 초식 공룡이에요. 종 자체가 달라요. 물론 초식 동물만의 장점도 있죠. 하지만 '초식 동물이 고기도 먹으면 좋은 점이 더 많을 텐데'라는 생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근성'이라는 건 쉽게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라 승부나 자신의 브랜드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저도 '김정환' 하면 늘 믿을 수 있는 선수가 되려고 훈련 때부터 늘 신경을 최고조로 곤두세워요. 훈련을 경기같이, 경기를 훈련같이 하는 거죠. 물론 저도 이런 제 근성이 가끔은 싫어요. 늘 몸이 뜨거워서 오래 못 살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상욱이는 정말 오래 살 거예요. 혈압을 높일 일이 없거든요. 오=형, 제가 나중에 잘 보살펴 드릴게요.(웃음) 김=간병하러 올래?(폭소) -오상욱 선수도 이런 근성의 영향을 받았겠어요. 오=2016년에 세네갈로 국제대회를 갔는데, 단체전에서 저 때문에 졌어요. 그 당시 제가 따라 들어가는 동작을 잘 못해서 그런 일이 빈번히 일어났거든요. 그때 형이 외국 선수들도 다 있는 데서 '너 지금 (잘 안되는) 그 동작 100번 해' 하더라고요. 경기에 져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저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김=경기장에서 피스트에 서 있던 상욱이한테 '너 이리 내려와 봐' 했죠.(웃음) 오=다른 선수들은 별로 신경 안 썼겠지만, 저는 솔직히 남들이 다 보는 데서 그 동작을 반복하면서 조금 창피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조금씩 잘 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됐다' 싶은 느낌이 오더라고요. 김=결국 그게 오상욱을 세계랭킹 1위로 만든 주 무기가 됐어요. 저도 과거에 가장 못 했던 동작이 지금 저의 주된 기술이거든요. 운동 선수가 자신 없는 기술을 회피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내 팔다리도 멀쩡한데 남들 다 하는 게 안 될 리 없다. 될 때까지 해보자' 하면서 하다 보면 단점도 장점이 될 수 있고요. 그래서 저도 상욱이한테 '남들이 보든 말든 100개 해' 한 건데, 어느 순간 그 동작을 저보다 잘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어펜저스' 인기 덕에 펜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겠어요. 김=주변의 펜싱 선후배들이 직접 운영하는 펜싱 클럽이나 동호회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연락을 많이 주세요. '너희들이 큰일 하고 있다'면서요. 저희한테 맛있는 밥이라도 사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와서 사인회 좀 하라'면서 더 활용하려는 분위기입니다.(웃음) -최근 열린 두 차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어펜저스' 멤버가 1~3위를 휩쓸었죠. 김=동생들에게 '우리가 펜싱으로 계속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세계 1등을 하고 와서 박수를 받았는데, 국내 경기에서 1등을 못하면 반대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고요. 국내 대회 잘 치러서 '도쿄올림픽 매듭을 잘 짓자'고 했는데, 완벽한 매듭을 지었네요. 앞으로는 국제대회에서도 우리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야죠. 그래야 저희가 지금 받는 사랑도 떳떳하게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을까요. 김=저희가 요즘 방송에서 실제 모습의 95% 정도를 보여드리고 있는데,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고 싶어요. 그게 곧 펜싱 대중화의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세 번의 올림픽을 겪어본 선수로서, 지금의 관심과 사랑이 '역대급'이라고 느껴요. 앞으로는 펜싱이 '반짝 올림픽 특수'에 그치지 않고, 올림픽 준비기간에도 꾸준히 응원을 받을 수 있는 종목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저희들도 박찬호(야구), 박세리(골프), 김연아(피겨스케이팅) 선수들처럼 꾸준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됐으면 하고요. 물론 펜싱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1순위겠죠. 펜싱도 이렇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종목이라는 걸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오=도쿄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할 때, 럭비 대표팀 선수들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공항에서 저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서 축하와 박수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럭비 선수들은 저희 때문에 짐을 다 찾고도 안에서 10분간 대기하고, 나와서도 사진 두 장만 찍고 집에 가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그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 수가 저희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거든요. 몸싸움을 해야 하는 종목들은 특히 땀을 진짜 많이 쏟잖아요. 저희가 잘해서 이렇게 관심받고 인기도 얻는 건 당연히 정말 감사하죠. 그와 동시에 금메달은 못 땄어도 정말 값진 땀을 흘린 다른 종목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김=맞아요. 저희 역시 과거에는 럭비 대표팀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예전의 서러움을 다 겪어본 세대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요. 지금 상황이 어려운 여러 종목들도 대중의 관심이 있다면 성장 기간이 단축될 수 있어요. 그늘에 가려진 비인기 종목에도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으면 해요. 배영은 기자
2021.09.23 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