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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줄 알았던” 매기 스미스 별세…‘해리 포터’ 인연들 추모 [왓IS]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맥고나걸 교수 역으로 사랑받은 영국 배우 매기 스미스가 세상을 떠났다.BBC, 로이터통신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매기 스미스는 지난 27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9세. 외신에 따르면 매기 스미스의 두 아들 토비 스티븐스와 크리스 라킨은 이날 “어머니는 오늘 이른 아침 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며 성명을 냈다.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으나 고인은 오랜 기간 암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매기 스미스는 1934년생으로, 1950년대 영국 연극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 70년 넘게 영미권 연극·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아카데미상과 에미상, 토니상을 석권한 명 배우로, 1990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경’(Sir)의 여성형인 ‘데임’ 칭호를 받았다.2000년대 들어서는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 출연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의 별세 소식에 ‘해리 포터’ 시리즈 인연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 해리 포터 역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28일 자신의 SNS에 “매기 스미스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9살이었다. 그는 강렬한 지성을 지닌 사람이자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혀를 가졌으며, 위협적인 동시에 매혹적이고, 매우 재밌는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이어 “촬영장에서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었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항상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전설이라는 단어는 그에게도 해당된다”고 존경을 표했다. 론 위즐리 역의 루퍼트 그린트도 “그와 함께 세트를 공유할 수 있어서 몹시 행운이다. 특히 함께 춤을 출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며 ‘해리 포터’ 영화 속 한 장면을 추억으로 공유했다.헤르미온느 역의 엠마 왓슨은 “어렸을 때 메기 스미스의 전설에 대해 전혀 몰랐다. 어른이 돼서야 위대한 분과 함께 호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있어 행운이었다. 정직하고, 재미있고, 자존감이 높았다. 남자 교수들 가운데서도 정말 잘 버텼다”고 돌아봤다.말포이를 연기한 톰 펠튼 또한 “그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첫날부터 우리를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변신술 수업 중 웃음을 멈출 수 없었을 때 촬영장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추억했다.‘해리 포터’ 원작 소설가 JK 롤링도 극 중 매기 스미스의 사진을 게시하며 “영원히 살 줄 알았다. 매기 스미스의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 이주인 기자 juin27@edaily.co.kr 2024.09.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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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전술에서 유래한 축구 선수의 셔츠 번호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팀 스포츠 선수들의 셔츠에는 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이를 지칭하는 이름도 꽤 다양해, 셔츠 번호, 저지(jersey) 번호, 스쿼드(squad) 번호, 유니폼 번호 등으로 불린다. 번호가 붙게 된 계기는 유사한 셔츠를 입은 선수들을 쉽게 구분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식별하기 위해 설계된 번호는 정서적인 애착을 거쳐 자부심과 명예의 원천이 되었고 때로는 미신과 연관되었다. 일부 스포츠에서는 번호로 선수의 포지션을 나타냈다. 축구가 대표적인 예다.아울러 스포츠 산업의 발전과 함께 어떤 선수에게는 번호가 자체 브랜드로 발전했다. 포르투갈의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는 그의 이름 이니셜과 셔츠 번호를 따서 CR7을 만들었다. 잉글랜드 축구의 공식 경기에서 셔츠 번호의 첫 등장은 1933년 FA컵 결승전 에버튼과 맨체스터 시티(맨시티)의 대결에서 나왔다. 관중, 심판, 미디어 담당자가 선수들을 잘 식별할 수 있도록 에버튼은 1~11번, 맨시티는 12~22번을 셔츠에 새겼다. 당시 에버튼에는 딕시 딘(Dixie Dean, 딘은 1927~28시즌 1부 리그에서 60골을 넣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이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는데, 9번이 그에게 배정됐다. 이후 잉글랜드에서 9번은 골잡이인 센터 포워드를 상징하게 된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3-5-2와 4-4-2, 2000년대에 인기를 얻은 4-2-3-1대신 100여 년 전 축구에서는 2-3-5가 대세였다. 축구의 전술 역사상 최초의 포메이션이었던 2-3-5는 선수들 위치의 모양을 따서 피라미드라고 불렸다. 선수들의 포지션을 나타내는 셔츠 번호도 2-3-5 전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골키퍼는 1번을 달고,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순으로 낮은 번호에서 높은 번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또한 교체 선수는 더 큰 번호를 달았다. 1993년 잉글랜드축구협회(The FA)는 선발 라인업에 1~11번을 의무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정된 스쿼드 넘버로 전환했다. 이러한 스쿼드 번호는 포지션에 따라 부여될 때도 있고, 선수 이름의 알파벳 순서나 선수가 선호하는 번호로 정해질 때도 있다.현재 국제축구연맹(FIFA)은 선수들이 1~99번 사이의 번호를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보통 숫자가 큰 번호를 단 선수는 신인이거나 팀 내 입지가 확실치 않은 경우다. 또한 스쿼드 번호가 높은 숫자에서 낮은 숫자로 변경될 경우는 해당 선수가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는 데뷔 시즌인 1998~99시즌 28번을 달았다가, 2년 후 17번으로 바뀌었다. 2004~05시즌 에밀 헤스키가 리버풀을 떠난 후 제라드는 헤스키의 번호인 8번을 꽤 차게 된다. 신인 때 부여받았던 스쿼드 번호를 끝까지 고집하는 선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첼시에서만 19시즌을 소화한 센터백 존 테리다. 테리는 26번으로 첼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센터백의 넘버인 5~6번을 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첼시에서 언제나 26번을 착용했다. 그런 테리도 국가대표팀에서는 6번을 달 수밖에 없었다.개인적인 이유로 특정 번호를 선호하는 선수들도 있다. 이탈리아의 마리오 발로텔리는 인터 밀란에서 신인 시절 스쿼드 번호 36~50번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45번을 선택했는데, 4+5=9이고, 9는 전통적인 스트라이커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그는 45번을 달고 초반 4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는 행운을 누렸다. 그 후 발로텔리는 맨시티, 리버풀, AC밀란에서도 45번을 달고 뛰었다. 특정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번호를 달고 경기하는 경우도 있다. 2008년 리버풀이 유럽 문화의 수도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에버튼의 제임스 비티와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는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의 승인을 받고 특별한 번호를 달았다. 2006년 3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비티와 제라드는 2008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번호이자 한자리 숫자인 8이 아닌 두 자리 숫자 08번을 착용했다.과거와 달리 선수들의 스쿼드 번호는 더 이상 포지션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플레이메이커로서 10번이 안성맞춤이었던 지네딘 지단은 유벤투스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각각 21번과 5번을 착용했다. 그럼에도 특히 7~11번은 뛰어난 선수만이 달 수 있는 특별한 번호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8.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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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축구의 별’ 바비 찰튼, 86세 나이로 별세…축구계 애도 물결

잉글랜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바비 찰튼이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영국 BBC 등 주요 매체는 21일(한국시간) 찰튼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BBC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찰튼을 칭하며 애도의 목소리를 전했다.가레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감독은 “찰튼 경을 여러 차례 만날 수 있는 특권을 통해 잉글랜드를 대표했던 그의 개인적인 자부심과 감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축구계의 신사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위상을 마음속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축구계는 전설을 잃은 슬픔으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에릭 텐 하흐 맨유 감독은 22일 셰필드 유나이티드전(2-1 승)을 마친 후 “전설, 거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업적은 정말 엄청나고 거대하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가 이룬 업적은 놀랍다”며 “그를 만날 영광은 없었지만, 매우 겸손하다고 들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다”고 고인을 떠올렸다. 1956년 맨유 1군에서 데뷔한 찰튼은 1973년까지 맨유에서 758경기를 소화했다. 이 기간 249골을 넣었으며 세 차례 리그 우승, 유러피언컵, FA컵 우승 등에 크게 기여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A매치 106경기에 나서 49골을 넣었다. 2015년 웨인 루니가 50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찰튼이 잉글랜드 A매치 최다 골 기록을 보유했다. 1973년 축구화를 벗은 찰튼은 맨유 지휘봉을 잡는 등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1994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찰튼은 종종 맨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올드 트래퍼드를 찾는 등 친정팀과 축구에 관한 애정을 드러냈다. 2020년에는 찰튼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축구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찰튼이 세상을 떠나자, 축구계에는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맨유는 “구단은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사랑받았던 선수 중 한 명인 찰튼 경의 타계를 애도하고 있다”며 “축구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만큼이나 스포츠맨십과 성실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찰튼 경은 축구계의 거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김희웅 기자 2023.10.2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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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리버풀 FC vs. 에버튼’, 비틀즈의 선택은?

리버풀은 잉글랜드의 북서부 머지사이드(Merseyside) 주에 위치한 도시다. 19세기의 리버풀 항구는 세계 물동량의 절반을 담당했고, 한때 리버풀은 런던보다 부유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석탄에서 석유로 산업 구조가 변하면서 도시는 빠르게 몰락했다. 21세기의 리버풀은 도시 재생 사업 등을 통해 암흑기에서 벗어났다. 경제적으로도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게다가 유럽연합이 리버풀을 2008년 ‘유럽 문화의 수도’로 선정할 만큼, 이 항구 도시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한다.리버풀은 음악과 축구의 진정한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이와 연관된 세계적인 브랜드 2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하나는 리버풀FC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밴드 비틀즈다. 따라서 이 두 브랜드가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은 비틀즈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반영하듯 구글에서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비틀즈가 리버풀FC를 지지했는지 여부다. 비틀즈 4명의 멤버는 모두 리버풀 출신이다. 축구의 도시 리버풀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 리버풀FC와 에버튼의 연고지다. 이 도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주로 하는 질문이 있다. “Are you a red or a blue?(당신은 레드입니까, 블루입니까?)” 즉 리버풀FC(레드)와 에버튼(블루) 중 누구를 응원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비틀즈는 과연 레드와 블루 중 누구를 사랑했을까?우선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1965년 빌 샹클리 감독의 리버풀은 FA컵 결승전에 올랐다. 이에 비틀즈는 멤버 전원의 이름으로 샹클리에게 전보를 보내 행운을 빌었다. 이 전보는 지금도 리버풀에 위치한 샹클리 호텔에 전시되어 있다. 1967년 비틀즈는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을 발표했다. 이 앨범 커버 삽화에 들어간 유명인 중 축구 선수는 리버풀FC의 공격수 앨버트 스터빈스(Albert Stubbins)가 유일했다. 커버에 삽입될 유명인 리스트를 결정할 때 링고 스타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 3명의 의견이 반영됐고, 존 레논이 스터빈스를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틀즈 역사학자 레이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스터빈스가 포함된 이유는 존보다는 리버풀 팬이었던 그의 아버지 알프레드 레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레논은 앨범 커버에 ‘예수 그리스도’와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도 포함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음반회사 EMI는 이 제안을 거절했는데, 예수의 경우 레논이 과거에 한 인터뷰가 큰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1966년 레논은 런던신문 이브닝 스탠다드와의 인터뷰에서 “대중이 예수보다 비틀즈에 더 빠져 있고, 기독교 신앙은 쇠퇴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이 발언은 영국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일부 라디오 방송국은 비틀즈의 음악을 틀지 않았고, 기자회견은 취소되었으며, 시위도 벌어져 밴드의 앨범을 태웠다. 이에 레논은 “자신과 밴드를 그리스도와 비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거듭 사과했다. 그러나 레논의 경솔한 발언은 결국 그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1980년 12월 비틀즈의 팬이었던 마크 채프먼이 레논을 향해 권총 4발을 쏜 것이다. 채프먼의 살인 동기 중 하나가 ‘레논의 신성모독’이었다.한편 비틀즈는 1970년 그들의 12번째 이자 마지막 앨범인 ‘Let It B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의 ‘Dig It’이란 노래에는 “Matt Busby, dig it”이란 가사가 있다. ‘Matt Busby(맷 버즈비)’는 리버풀FC의 선수였기에,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가설도 있다. 하지만 버즈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만든 감독으로 더 유명하다. 이렇게 추측만 있을 뿐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구체적 물증은 없다. 게다가 비틀즈가 레드 혹은 블루를 지지한다고 밝히면, 라이벌 클럽 팬들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는 위험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대중의 기대와 달리, 정답은 ‘비틀즈의 멤버 4명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이다. 특히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이 여기에 속한다. 해리슨은 어느 팀을 지지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There are three teams in Liverpool and I prefer the other one(리버풀에는 세 팀이 있고 나머지 한 팀이 더 좋습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특정 팀과 연계되는 것을 피했다.흥미롭게도 링고 스타는 아스날 팬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링고는 런던 출신의 아스날 팬이었던 양아버지와 함께 리버풀에 원정 온 ‘거너스(The Gunners, 아스날의 애칭)’ 경기를 보러 다닌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링고도 열정적인 팬과는 거리가 멀었다. 폴 메카트니는 공개적으로 축구와 연관된 행보를 보인 유일한 비틀즈 멤버다. 가족의 영향으로 블루가 됐다는 폴은 어렸을 때 축구를 즐겼으나, 소질은 없었다.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던 폴은 TV로 축구를 보는 것은 즐기나, 열렬한 팬은 아니라고 밝혔다. 게다가 폴은 웸블리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리버풀 FC에서 선수와 감독을 지낸 케니 달글리시를 만난 이후, 레드도 응원하게 됐다고 한다. 폴은 기본적으로 블루와 레드 둘 다 응원하지만, 두 팀이 만나며 에버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비틀즈의 멤버 중 리버풀FC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밴드는 분명 축구에 열광하는 도시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비틀즈는 특정 클럽이 아닌 리버풀 도시 자체를 상징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3.09.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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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전설적인 암살단 ‘어쌔신’의 후예도 축구선수였다

프랑스의 게임 제작 회사 유비소프트가 만들어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라는 게임이 있다. 시리즈의 첫 작품에 해당하는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암살자의 신념)’는 2007년 출시되었다. 소수의 엘리트로 인류의 질서를 세우려는 템플기사단과 이에 맞서 인간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암살단 간의 갈등이 게임의 주요 설정이다. 흥미롭게도 템플기사단과 어쌔신은 실제로 존재했다. 지난 칼럼에서 다뤘듯이 십자군 전쟁 시기에 태동한 템플기사단은 이단이라는 누명을 쓴 채 결국 해체된다. 살아남은 기사단의 일부는 포르투갈에서 ‘그리스도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이들은 포르투갈 국왕에 충성을 맹세했고,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의 국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18세기 후반 세속화한 기사단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그리스도 기사단의 최고 책임자인 단장은 포르투갈 대통령이다. 이슬람은 7세기 초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공동체는 분열된다. 이슬람의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렇게 탄생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전 세계 무슬림의 85%와 15%를 각각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지금도 치열하게 대립한다. 한편 시아파의 분파 중 하나인 이스마일파는 10세기 초 파티마 왕조를 세운다. 11세기 말 파티마 왕조 내에서 후계자 문제로 형제들이 갈등을 빚은 끝에 니자르파가 갈라져 나온다. 니자르파는 본래 의학, 과학 등에 전념하는 지식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수니파 이슬람을 통일한 셀주크 제국이 시아파를 탄압하자, 니자르파 신도들은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바꾼다. 1090년 하산 에 사바흐는 니자르파를 이끌고 이란 북부 산악지형의 알라무트 요새에서 정치-종교 공동체인 어쌔신을 만든다. 이 조직은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유사점이 많았다. 구성원들은 훈련과 교육을 받았고, 교단의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니자르파의 어쌔신은 세력이 크지 않았고, 막강한 군사력도 없었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들은 전면적인 전쟁보다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전략을 세운다. 소수 정예였던 어쌔신은 그들에게 최대의 적이었던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물크의 암살에 성공한 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게임 시리즈와는 달리 실제 어쌔신의 적은 템플기사단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은 수니파와 시아파를 가리지 않고 자신과 대립하는 세력의 주요 인사들을 무차별 암살했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십자군의 사주를 받고 무슬림 요인을 암살하기도 했다. 어쌔신이 활약할 당시 중동 지역에서 이들의 위협을 받지 않은 주요 인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영어 단어인 암살자(assassin)와 암살(assassination)도 이들의 조직 이름에서 기원했다. 어쌔신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암살을 종종 시도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의 암살 시도는 이들에게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암살이 성공해도 이들이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쌔신은 임무를 수행했고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였다. 어쌔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의지는 이들이 복용한 마약 때문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쌔신은 페르시아어 하사신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는 ‘하시시(hashish, 대마초) 사용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 알려진 이들에 대한 정보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와 십자군이라는 적대적인 출처에서 대부분 나왔기 때문에, 어쌔신이 마약을 복용했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어쌔신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암살만으로는 결코 적을 이길 수 없다는 한계도 뚜렷했다. 결국 동쪽에서 몰려온 몽골족에 의해 1256년 니자르파와 어쌔신의 알라무트 요새가 함락됐고, 이들은 몰락했다. 니자르파와 어쌔신의 후예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탄압을 피해 인도, 파키스탄으로 이동한 어쌔신의 후예들은 후에 유럽으로 넘어간다. 현재 니자르파를 이끄는 지도자는 아가 칸 4세다. 그는 영토는 없지만 따르는 국민은 있는 독특한 군주이기도 하다. 193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카림 왕자로 태어난 그는 똑똑했고, 잘 생겼으며 스포츠를 즐겼다. 과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카림 왕자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의 입학 허가서를 받았으나, 할아버지인 아가 칸 3세의 권유로 하버드 대학에서 이슬람 역사를 전공했다. 유럽에서 축구를 익힌 카림은 하버드 대학에서 1학년이 주축이 된 축구팀을 만들었고, 종종 골을 기록했다. 그의 축구팀은 무패로 시즌을 마감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조상 대대로 스포츠를 중요시한 전통으로 인해 카림은 축구 외에도 스키 등 여러 스포츠를 즐겼다. 하지만 그는 야구나 미식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957년 아가 칸 3세는 후계자로 아들 대신 손주인 카림 왕자를 지목하고 세상을 떠났다. 20살 대학생이었던 카림 왕자가 아가 칸 4세가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그에게 ‘전하(Highness)’ 호칭을 수여했다. 1959년 그는 하버드 대학의 축구선수이자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다. 카림은 박사 과정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왕이 되는 바람에 이를 포기해야 했다. 아가 칸 4세로서 그의 스포츠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관심 종목이 축구와 스키에서 말타기로 변한 것이다. 아가 칸 4세는 거대한 말 목장을 프랑스와 아일랜드에 가지고 있고 경마팀도 운영한다. 그는 2006년 영국 최대 말 경매장의 지분을 확보해 1대 주주가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세계 최대 민간 네트워크 중 하나인 ‘아가 칸 개발 네트워크’를 설립해 개발도상국의 취약 계층을 위한 사회 활동도 전개했다. 선조인 어쌔신은 암살로 악명을 날렸다. 하지만 아가 칸 4세는 이슬람에 널리 퍼진 문맹, 기아, 성차별 등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힘쓰고 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5.13 08:00
스포츠일반

이동섭 국기원장, 오세훈 서울시장과 제2국기원 건립 후보지 논의

‘세계태권도본부’ 국기원과 서울시가 제2국기원 건립 후보지 선정을 위해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 빠르면 올 상반기 중 최종 이전 후보지가 결정될 예정이다. 국기원(원장 이동섭)은 1월11일 서울시청에서 이동섭 국기원장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 국기원과 서울시에서 제시한 후보지 등을 대상으로 본격 실무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원장과 오 시장은 지난해 5월 서울시청 본관에서 ‘국기원의 서울시 이전 건립, 태권도 및 서울 관광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그동안 이전을 위해 다양한 실무 논의를 진행해 왔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국기원은 전 세계 태권도인의 성지로 지난 50년 동안 상징적인 역할을 해왔다. 대한민국의 문화를 알리는 첨병이며 K컬처의 선두. 그러나 시설의 노후와 안전의 문제가 불거졌다. 특히 2020년 강남구청의 석면 실태조사에서 건물 내 석면의 존재가 확인됐다. 석면은 호흡기를 통해 흡입되면 배출되지 않고 몸속에서 암을 일으키는 극도로 위험한 물질로 세계적으로 사용이 금지되고 있다.또 편의시설 부족과 시설 노후로 안전에 대한 우려가 재기됐다. 여기에 태풍, 장마 등 자연재해로 인해 누수, 누전, 정전이 발생하고 화재의 위험에도 노출 돼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국기원을 다녀간 사람 가운데는 작고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필립 벨기에 국왕 등이 있으며 국빈급 3,527명이 명예 단증을 받았다.이동섭 국기원장은 “오세훈 시장이 적극적으로 제2국기원 건립에 뜻을 같이해 MOU를 맺은 지 1년도 안 돼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게 됐다”면서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한 2023년은 ‘국기’ 태권도의 위상을 강화하고 태권도의 세계화를 더욱 단단히 하는 의미 있는 해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2013년 지정된 현 국기원은 리모델링 등을 통해 교육, 연수, 훈련, 관광상품 연계 등 다양하게 활용할 계획이다.국기원은 1월11일, 12일 중앙언론과 전문지 태권도담당 기자들과 각각 언론간담회를 개최하고 제2 국기원 건립 및 2023년 주요 사업인 ▷국기 태권도 지정 5주년 기념행사 ▷해외지원·지부 확대 ▷계간지 복간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특히 2018년 ‘국기’ 지정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3월25일 ‘국기지정 5주년 행사’를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갖기로 했다. 이 행사에서는 도복을 입은 10,000여 명의 태권도인들이 태극1장 단체시범을 보일 예정. 대회장은 이동섭 원장이 맡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명예대회장을 맡는다.김희웅 기자 2023.01.14 17:23
해외축구

'잉글랜드 축구 간판' 데이비드 베컴, 신년 기사 작위 수여 목록서 제외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중 하나인 데이비드 베컴(47))이 기사 작위 수여를 다음 기회로 넘기게 됐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더 미러 등 해외 매체에 따르면, 베컴은 2023년 신년 기사 작위 수여 목록에서 제외됐다. 익스프레스는 “베컴은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한 혹독한 기다림을 겪고 있다. 그는 다시 한번 새해 영예 목록에서 제외됐다. 축구에 바친 모든 것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고 오랜 시간 긍정적으로 생각해왔지만, 다시 실망을 견디고 있다”고 전했다. 베컴은 지난 200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OBE(대영 제국 최고훈장·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ore)을 받은 바 있다. 이는 영국의 기사도 훈장으로, 예술과 과학 등에 대한 공헌, 자선 단체 및 복지 기관과의 협력, 공무원 이외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보상을 기리고자 하는 훈장이다. 대영 제국 훈장 중에서 4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기사 장위와 훈장은 별개다. 기사 작위를 받으려면 최고 등급 1·2등급의 훈장을 받아야 한다. 즉, 1등급인 대영 제국 훈장 대십자 기사·여기사(GBE)와 2등급인 대영 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여기사(KBE/DBE)를 받아야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감독을 맡았던 알렉스 퍼거슨 같은 경우 영국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아 ‘알렉스 퍼거슨 경(Sir)’으로 불린다. 베컴은 맨유를 시작으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AC 밀란(이탈리아) 파리 생제르맹(프랑스) LA 갤럭시(미국) 등 유수의 명문 클럽을 거쳤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특유의 프리킥 실력 등으로 축구계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광고계의 러브콜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개인상도 많이 받아 실력과 외모 빠짐이 없는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팀에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안기기도 했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베컴이 기사 작위 수여 명단에서조차 제외된 이유는 해외 매체가 지적하듯이, 과거 탈세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다양한 자선단체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던 베컴은 예년에도 기사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탈세 의혹으로 번번이 취소된 바 있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단체인 LGBTQ+로부터 과한 반발을 받은 것도 문제다. 베컴은 2022 카타르 월드컵 홍보 대사로 참여했다. 카타르는 성소수자에 엄격한 제도를 유지 중인데, 그의 결정이 LGBTQ+로부터 반발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데일리 스타는 “베컴의 카타르 대회 홍보대사 결정은 카타르의 인권 유린 역사와 적대적인 성소수자 법률로 비판이 일었다”고 했다. 김영서 기자 zerostop@edaily.co.kr 2022.12.31 14:27
연예일반

윤송아, 영국 왕실 초대작가 선정 ‘찰스3세 즉위 예술제’ 낙타시리즈 전시

배우 겸 화가 윤송아가 영국 왕실 초대작가로 선정됐다. 윤송아는 26일(이한 현지시간)부터 28일까지 3일간 영국 런던 랜드마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찰스3세 즉위 예술제’에 초청받아 작품을 전시한다. 출품 작품은 윤송아의 대표 연작 ‘꿈꾸는 낙타’ 시리즈 가운데 ‘꽃 피우는 낙타’(Blooming Camel)와 ‘겨울왕국의 낙타’(Camel in Cool Wonderland) 등 2점이다. 최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센즈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글로벌아트페어 싱가포르’ 전시회에서 공개된 후 영국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게 됐다. 윤송아의 연작에 등장하는 낙타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현대인이 짊어진 책임감을 빗댄 낙타의 혹, 사막에서의 고난과 고독으로 인한 불안감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무게처럼 전해져 작품 감상의 진폭이 확장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된 윤송아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에 영국에서 생활할 당시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찰스황태자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여러 가지 추억을 떠올린다”며 “영국 왕실 초대작가로 찰스3세 즉위를 기념하는 예술제 전시에 참여하게 돼 정말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윤송아는 2013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2013 루브르 아트 쇼핑’(Carrouseldu Louvre Are Shopping)에 한국인 최연소 작가로 초청돼 낙타 시리즈 작품을 전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국제 앙드레말로 협회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번 영국 왕실 초대작가 선정은 향후 윤송아의 유럽 활동을 가늠케 한다. 윤송아는 연말까지 바쁜 전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이달 말까지 카미더가든 개인전을 비롯해 라움아트센터 ‘2022 위대한 여정展’, 앤드트리갤러리 ‘미드 나잇 러브’, 일산 킨텍스 ‘디지털미디어테크쇼’, 부산 시그니엘 ‘블루아트페어’ 등에 초대작가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정진영 기자 afreeca@edaily.co.kr 2022.11.27 12:56
스포츠일반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더 선(The Sun)을 아십니까?

2022년 9월 26일은 본 칼럼이 연재되고 있는 일간스포츠가 창간한 지 5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종합지의 스포츠 섹션은 분량이 한정적인데 반해, 스포츠신문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중점적으로 보도한다. 국내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전환점을 맞이한다. 프로야구(KBO리그)와 프로축구(K리그)가 출범한데 이어,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연달아 개최됐다. 축구대표팀은 1986 멕시코 월드컵부터 꾸준하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아울러 1994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MLB) 계약은 국내 팬들이 해외 스포츠에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스포츠의 인기 상승과 함께 스포츠서울(1985년)과 스포츠조선(1990년)도 연달아 창간했다. 스포츠신문의 전성시대였다. 1990년대 서울 지하철의 풍경을 기억하는 독자분이 있다면 그 당시 스포츠신문이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 것이다. 프리미어리그(EPL)의 인기와 함께 국내에도 영국 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에 반해 그들의 스포츠신문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영국 스포츠신문의 어제와 오늘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7세기 영국에는 뉴스와 가십(gossip, 소문·잡담)을 다루는 정기 간행물이 출현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영국 정부의 검열 완화와 더불어 더욱더 많은 출판물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간 신문 더 타임스(The Times)는 1785년 창간했다. 19세기 초반 선도적인 신문의 자리에 오른 더 타임스의 영향으로 세계의 많은 신문사는 ‘타임스’란 이름을 차용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뉴욕타임스다. 1896년에는 데일리 메일(Daily Mail)이라는 신문이 런던에서 창간했다. 데일리 메일은 중산층 이하의 독자를 겨냥한 영국 최초의 일간 신문이었다. 여성 독자를 겨냥한 첫번째 신문이기도 했던 데일리 메일은 큰 인기를 얻어, 하루에 백만 부 이상을 판매한 영국 최초의 신문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적으로 영국 신문은 3가지 형태로 나뉜다. 첫번째 형태는 품질을 중시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뉴스와 사설, 논평 등을 심층적으로 보도하는 ‘퀄리티(quality)’ 신문이다. 이들은 브로드시트(broadsheets)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커다란 신문 크기에서 이러한 이름이 유래했다. 브로드시트는 보통 57cm 정도의 긴 세로 면을 가지고 있다. 더 타임스, 더 가디언 등이 영국을 대표하는 퀄리티 신문이다. 두 번째 유형은 ‘인기 있는(popular)’ 신문이다. 브로드시트보다 작은 크기로 발행되는 관계로 이들을 타블로이드(tabloid)라고 부른다. 타블로이드는 중요한 사건의 객관적인 기사보다는 주로 대중의 흥미를 끄는 보도를 중요시한다. 황색 언론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역사적으로 타블로이드는 신문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다. 브로드시트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중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더 선, 데일리 미러, 데일리 스타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퀄리티’와 ‘인기 있는’ 신문의 중간 역할을 하는 이들을 ‘중간 시장 신문(middle-market newspaper)’이라고 부른다. 이 신문은 중요한 뉴스를 보도할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좋아하는 독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들은 타블로이드 형태로 발행되고, 데일리 메일과 데일리 익스프레스가 여기에 속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자료를 보면 영국민들은 심각한 뉴스를 다루는 퀄리티 신문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타블로이드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더 선은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신문이었다. 1980~90년대 이 신문의 하루 평균 발행 부수는 400만 부에 가까웠다. 2000~2010년대에도 300만 부 이상을 꾸준히 발행했다. 서민과 노동자 계층을 주 고객으로 하는 더 선은 스포츠와 연예계 뉴스 및 유명 인사들의 스캔들 같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주제를 중점으로 보도한다. 더 선의 전신은 1964년 창간된 브로드시트 신문인 데일리 헤럴드였다. 하지만 1969년 호주의 유명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인수한 후 더 선이라는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재탄생한다. 한국의 일간스포츠와 영국의 더 선은 1969년 창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 선의 3번째 페이지(Page 3)는 초창기 신문이 인기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 11월 더 선은 영국 타블로이드 최초로 페이지 3에 토플리스(topless, 상의를 입지 않은) 차림의 매력적인 여성 모델 사진을 실었다. ‘Page 3 girl’이라 불리는 이들 덕분에 다음해 더 선의 판매량은 두 배로 뛰었다. 결국 1978년 더 선은 데일리 미러를 제치고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된다. 이러자 다른 타블로이드도 경쟁적으로 페이지 3에 토플리스 차림의 여성 모델 사진을 올리게 된다. 페이지 3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다양했다. 오락의 한 요소로 이를 좋아한 독자가 있는데 반해, 보수적인 이들은 전국 신문에 올리기에는 부적절한 ‘소프트 포르노’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사진이 여성을 비하하고, 성차별을 지속시킨다며 반대했다. 정치권도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페이지 3의 사진을 없애자는 주장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선 것이다. 결국 의회에서 페이지 3에 반대하는 법안은 제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2012년부터 ‘No More Page 3(페이지 3는 이제 그만)’ 캠페인이 활발히 전개됐고, 여기에 찬성하는 국회의원이 140명에 이르렀다. 아울러 많은 대학과 노동조합도 이에 가세했다. 결국 더 선은 토플리스 여성 모델 사진을 사용한 지 44년만인 2015년 1월 페이지 3를 중단했다. 다른 타블로이드도 더 선의 결정을 따랐고, 2019년 4월 데일리 스타를 마지막으로 타블로이드 일간지에서 페이지 3 사진은 사라졌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9.28 07:00
연예일반

MBC ‘100분 토론’ 방탄소년단 병역 논란 조명

세계를 호령하던 방탄소년단을 향한 국내의 병역 논란이 다시 뜨겁다. 가장 연장자 멤버인 진의 입영 통지가 3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병역특례법 개정 논란이 다시 불거지는 것. 법이 바뀌지 않으면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12월부터 순차적으로 입대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 이들에게 병역특례를 제공하자는 주장과 병역의 의무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이에 20일 방송되는 MBC ‘100분 토론’은 방탄소년단의 병역 논란을 조명한다. 순수 예술 전공자에게는 허용되는 병역특례가 빌보드차트 1위,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수상 등의 성과를 낸 방탄소년단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타당한지, 반대로 국익을 높이고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는 이유로 병역특례를 받는 것은 공정한지, 박지원 전 국정원장과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출연해 병역특례법의 쟁점 속 ‘사건의 이면을 다시보는 토론’(‘사이다 토론’)을 펼칠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 방송은 국민의힘의 ‘요즘정치’도 조명한다. 지난 19일 국민의힘은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냈다. 이날 오전 국민의힘은 5선의 주호영 의원을 원내대표로 선출하며 새로운 당 분위기 정비에 나섰다. 하지만 곧이어 정진석 비대위원장과 유상범 의원의 문자가 공개되며 당내 갈등은 다시 심화되고 있다.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한 추가 징계 착수 등, 여러 논란이 한창인 국민의힘의 ‘요즘정치’를 돌아본다. 이어 엘리자베스 여왕 장례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참배 일정을 취소한 것을 둘러싼 논란도 다뤄진다. 대통령실은 현지 교통상황 때문이었다는 입장이지만 미흡한 준비에 따른 치명적 외교 실수라는 비판 또한 쏟아지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슈가 쏟아지는 ‘요즘정치’. 이언주 전 국민의힘 의원과 정봉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코너에 출연해 최신 이슈를 치열히 토론할 전망이다. ‘100분 토론’은 20일 오후 11시 30분에 방송된다. 김다은 기자 dagold@edaily.co.kr 2022.09.2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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