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 했는데...” 故 현미, 눈물 속 영결식 [종합]
고(故) 가수 현미가 영면에 들었다.고 현미의 영결식 및 발인이 11일 오전 9시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빈소 현장에는 유가족 및 동료 연예인들과 취재진으로 가득했다. 영결식은 교회식으로 진행돼 예배를 올리는 시간을 따로 가졌다. 30분 정도 예배 시간 종료 후 대기하고 있던 동료 연예인들이 차례로 영결식 장소로 이동했다. 코미디언 이용식의 사회를 시작으로 고인에 대한 묵념, 고인의 약력을 설명하는 순으로 이어졌다. 이용식은 “정말 온 국민이 많은 분들이 슬픔 속에 있다. 바로 오늘 현미 누님과 작별하기 위해 누님께서 평소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는 동료, 후배, 일가 친척 모두 이 자리에 모셔서 슬픔 속에 영결식을 진행한다”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사는 이자연 대한가수협회장이 맡았다. 대기 전부터 여러 관계자를 살뜰히 챙겼던 이자연 협회장은 감정을 추스리고 추도사를 읊었다. 이자연 협회장은 “사랑하는 현미 선배님. 수십년간 불러온 노래처럼 ‘떠날 때는 말없이’ 어쩌면 그렇게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가십니까”라며 “선배님의 호탕한 그 웃음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라고 고인을 애도했다. 이어 “선배님이 계시는 자리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선배님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파워풀한 가창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세월이 흘러도 현역이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셨습니다”라고 회상했다.또 “우리 대한가수협회와 4월 13일 공연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멋진 무대 설 수 있다고 그렇게 기뻐하시더니 며칠을 앞두고 이리 황망하게 가시다니요”라며 “선배님은 늘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고, 70주년 기념 콘서트도 멋지게 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해놓고, 그 멋진 계획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 마디만 듣고 싶습니다”라고 슬픔을 고스란히 전했다.이와 함께 “하늘나라에서도 선배님 노래처럼 수많은 별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큰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시고 남은 열정과 못다하신 꿈은 하늘나라에서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선배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끝인사를 남겼다. 이자연 회장은 가요계 큰 별인 고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고인의 장례를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렀다.
추도사는 가수 박상민과 알리가 맡았다. 알리는 영결식 장소에 들어가기 전 대기하면서 묵묵한 표정으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먼저 대한가수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는 박상민은 “1주일 전 슬픈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최근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을 뵈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없었습니다”라며 “선배님께서 가요계에 남기신 업적은 실로 대단합니다.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성량과 예술성으로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기셨습니다”라고 추모했다. 박상민은 또 “후배 가수들에게 대스타이자 닮고 싶은 선배님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배님은 대한민국의 큰 가수이셨습니다”라며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항상 크고 넓은 마음으로 후배들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유명 가수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따뜻하고 멋진 분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항상 유쾌하고 씩씩하셨지만 이면에는 그 시절 어머님들의 아픔과 고단함, 때론 외로움도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 곳에서의 좋은 기억들만 가져가시고, 편안하게 영면에 드시길 바랍니다”라고 고인을 떠나보냈다.알리는 “선생님. 저는 불후의 명곡 ‘이봉조 선생님’ 편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노래를 듣고 눈물짓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라며 “선생님께서는 부군이신 이봉조 선생님과 함께 수많은 불후의 명곡을 남기셨습니다. 비록 세대는 다를지라도 선생님께서 가요계의 전설적인 분이라는 것을 후배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이어 “선생님의 노래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날에도 공연을 하셨다기에 놀라웠습니다”라며 “저 역시 가수로서 선생님의 열정을 닮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후배로서 그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이와 함께 알리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선생님 노래의 가사처럼 말없이 가셨습니다. 그리움은 남는 자들의 몫이라고 합니다. 저희 후배들은 이곳에서 선생님을 추억하고 그리워 할테니, 그곳에서도 좋아하는 노래 마음껏, 힘차게 부르시며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작별을 고했다. 조가는 지난 1964년 발매된 현미의 대표곡 '떠날 때는 말 없이'로 윤항기, 서수남, 알리, 이자연, 남일해, 임희숙, 박상민이 가창했다. 유가족의 분향 및 헌화 후 장례위원장인 서수남을 비롯해 협회 이사진의 헌화가 이어졌다. 영결식장에서 나온 동료 연예인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유족을 위로했다.
고인의 운구는 가수 김수찬, 양지원, 정준, 장군, 박상민, 염정훈이 함께 했다. 운구차가 이동하자 동료 연예인들은 눈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특히 조카 한상진과 노사연, 노사연 언니 노사봉은 영결식 내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흐린 날씨 속 운구 차량이 떠나자 옅게 내리던 비도 점차 그치기 시작했다. 고인의 유해는 영결식 이후 두 아들이 거주하는 미국으로 옮겨져 영면에 들 예정이다.
현미는 지난 4일 오전 9시 37분께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팬 클럽 회장이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머물던 고인의 두 아들을 비롯, 조카인 배우 한상진은 급거 귀국했으며 장례식을 지난 7일부터 5일간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렀다. 빈소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가수 나훈아, 남진, 이미자, 정수라 등 동료 가수 및 연예계 선후배들이 보낸 근조화환이 가득했다.현미는 1957년 ‘여대생 가수’ 타이틀과 함께 현시스터즈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칼춤 무용수로 무대에 올랐지만 당시 일정을 펑크 낸 어느 여가수의 대타로 마이크를 잡으면서 가수가 됐다. 이후 현미는 1962년 노래 ‘밤안개’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가수 이금희, 위키리, 한명숙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가수로 활약했다.또 현미는 색소폰 연주자 겸 작곡가인 남편 이봉조와 콤비를 이뤄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떡국’, ‘떠날 때는 말 없이’ 등의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미의 가장 최근 발매 곡은 지난 2017년 발표한 ‘내 걱정은 하지 마’다.지승훈 기자 hunb@edaily.co.kr
2023.04.11 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