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봇물 터진 재계 ‘투자시계’, 과연 영양가 있는 보따리인가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갑자기 재계의 ‘투자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지난 24일부터 3일 간 주요 대기업들은 약속한 듯 5년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대규모 투자와 고용 창출 소식에 고무된 분위기지만 실제 집행 여부에는 의문부호가 달리고 있다. 새 정부 출범 1000조 ‘투자 보따리’ 30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SK, 현대차, LG, 롯데 등 국내 10대 그룹이 발표한 투자 계획 규모는 1035조60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신세계와 CJ그룹까지 더하면 1076조원에 육박한다. 지금까지 국내 10대 기업이 올해처럼 비슷한 시점에 봇물 터지듯 투자 계획을 밝힌 적이 없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에 10대 그룹은 일제히 ‘통 큰 투자’를 약속했다. 4년 63조원을 발표한 현대차만 제외하고 모두 윤석열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같은 5년 투자 계획을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바뀔 때 1년 길어야 3년의 투자 계획을 공개하는 기업들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5년의 중기 계획을 일제히 발표한 전례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삼성이 반도체·바이오·신성장 정보기술 등에 450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혀 규모가 가장 크다. SK는 그룹의 핵심 성장동력인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 사업’에 247조원을 투자한다. 이어 현대차는 전동화 전환과 친환경, 신기술 등에 4년간 국내에만 63조원을 투자한다. LG도 배터리, 전장,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에 106조원에 달하는 국내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롯데는 모빌리티와 헬스 앤 웰니스, 수소 등 주요 신사업에 37조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정권 초기이니 만큼 기업들이 아무래도 정치적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의 통 큰 투자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정부와 딜을 통해 이뤄진 정치적 역학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구속력 없는 보여주기식 ‘쇼맨십’ 전례 없는 초대형 투자 계획 발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과 고유가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졌고, 대내외적인 환경이 악화된 가운데 나온 투자 계획이라 기업들의 위기 극복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행보로 평가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4일 450조원 투자 계획과 관련해 “숫자는 모르겠고 그냥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며 절박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30일 방한 중인 팻 겔싱어 인텔 CEO를 만나 글로벌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인텔은 양사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차세대 메모리,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생산공장), PC 및 모바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릴레이 회의를 가졌다. 또 삼성은 글로벌 초격차 행보를 위해 3년 만에 상반기 글로벌 전략회의 개최를 고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매년 6월과 12월 국내외 임원이 모여 사업부문별 업황을 점검하는 등 사업계획을 논의해왔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전략회의를 하반기에만 한 차례 열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상반기 전략회의를 열어 글로벌 정세에 대한 대응 전략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LG도 30일 구광모 회장 주재로 사업 전략보고회를 시작했다. 초대형 투자 규모에 대해 ‘알맹이 없는 보따리’라는 지적도 있다. 그룹 차원에서의 단순한 계획일 뿐 구속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일선 소장은 “5년 계획을 대략적으로 통 크게 발표했는데 분명 세밀하지 않다”며 “고용의 경우 문재인 정부 때도 늘린다고 했는데 속도가 현실화되지 못했고, 검증도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도 24~26일 대기업집단이 밝힌 투자계획과 관련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단체는 “각 그룹이 선정한 핵심 사업에 대해 막대한 투자를 해 경쟁력을 꾀하고 이를 통해 대규모 고용창출 효과까지 거둘 수 있다는 정도의 내용이 전부”라며 “어떤 계열사를 통해 어느 수준의 금액을 투자할지 등 정작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확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투자계획과 관련해 한국거래소는 각 상장회사가 공시대상이 되는 사항이었음에도 이를 공시하지 않았다면 공시위반이 될 수 있다”며 조회공시를 요구했다. 구속력이 없고 실제 집행 여부를 검증할 수 없는 대규모 투자 계획이라는 지적과 관련해서 한 대기업 관계자는 “보수적으로 접근한 투자 계획들이지만 실행 가능한 투자와 계획들로 채워졌다. 해당 사업부에서 이미 검증을 끝낸 항목들”이라고 답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2022.05.31 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