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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만사] ‘패왕별희’의 인기와 ‘삼체’에서 사라진 중국 문화대혁명

‘패왕별희’는 극중에서 펼쳐지는 경극 ‘패왕별희’에서 남자 주인공 초패왕 항우 역을 맡은 두안(장풍의)과 여자 주인공 우희 역을 맡은 두지(장국영), 두 경극 배우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은 영화다. 경극은 얼굴에 짙은 화장이나 가면을 쓰고 하는 중국의 전통극이다. 영화 속에서 애첩 역할을 남자 배우가 하는데, 대체로 경극은 평생 같은 역할을 하기에 그런 과정에서 두지는 점점 여자가 되어 간다. 경극학교에서 의도적으로 두지를 어릴 때부터 여자로 키운 결과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하게 된 두지는 형 동생 하던 사이인 두안을 남자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우희가 항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안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한다. 막상 두안은 두지를 그냥 귀여운 동생 취급을 하고, 주샨(공리)를 사랑한다. 셋은 기묘한 삼각 관계를 이룬다. 1993년에 나온 매력적인 퀴어 영화 ‘패왕별희’는 최근 30년만에 재개봉됐다. 장국영은 사라지고 없고(2003년 4월 1일 사망) 공리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으며 장풍의는 이제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이 영화는 지난달 30일 재개봉해 여전히 관객을 만나고 있다. ‘패왕별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중국 문화대혁명기 때의 광풍, 그 극단의 집단성을 묘사한 부분이다. 주인공 세명, 특히 장풍위는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고 그 과정에서 셋은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고 배신한다. ‘패왕별희’는 문화대혁명기 때 극좌 공산당원들이 보인 광기를 처절하리 만큼 자기반성적으로 담은 최초격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30년 전 공개될 때 특히 큰 관심을 모았다. ‘패왕별희’는 두 형제, 아니 연인 아닌 연인이 함께 겪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국공합작과 공산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근현대를 다룬 대서사 영화이기도 했다. 감독 천카이거는 이후 여러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때의 명성을 더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는 장이머우 감독과 함께 중국 제5세대 감독 군에 속했으며 중국 영화는 이 5세대 감독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가 절정기였다.중국 문화대혁명기의 광기 서린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에서도 나온다. 8부작 중 맨 앞 오프닝 장면에서다. 예원제의 아버지 예저타이는 칭화대학교의 저명한 이론물리학 교수이지만 우주의 근원을 아직 알 수 없다(未知)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 반동 제국주의 미국에 투항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홍위병들의 비판대에 선다. 예저타이는 예원제의 눈앞에서 어린 홍위병들이 내려 치는 혁대 버클의 매질로 사망한다. ‘삼체’는 이 에피소드를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1966년과 2024년을 자유롭게 오간다. 매우 중요하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장면이라는 애기이다. 정작 중국에서 ‘삼체’가 방영되는 조건은, 이 장면을 포함해 문화대혁명기에 대해 비판의 여지를 보이는 장면은 대부분 전면 삭제되는 것이었다. 중국판 ‘삼체’의 오프닝은 다르다. 그렇다면 ‘삼체’ 전체도 달라진 셈이다. 상황이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패왕별희’도 같은 운명을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30년 된 영화가 왜 이렇게 인기인가. 장국영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복합적인 이유가 배경일 것이다. 최근 들어 국내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클래식 영화나 한참 오래 전 영화를 재개봉하거나 기획전 혹은 특별전으로 상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히틀러의 마지막 날들을 그린 ‘다운폴’이 11년만에 재개봉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이 현재 그리 많이 찾지 않고 있지만 서울의 한 극장에서 진행됐던 일본 스즈키 세이준 특별전 때는 관객들이 꽤나 열광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4 재팬무비페스티벌 : 스즈키 세이준 미학 – 다이쇼 로망 3부작’이란 긴 이름으로 열린 이 특별전에서는 ‘지고이네르바이젠’ ‘아지랑이 좌’ ‘유메지’가 상영됐다.오래된 영화의 인기는 역설적으로 오래된 것들이 새롭기 때문이다. 젊은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작품들이고 ‘신상’이기 때문이다. 레트로 감성을 뛰어 넘는 ‘신세계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패왕별희’도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이 영화의 수입사는 조이앤시네마이다. ‘존 윅’ 시리즈 등 외화 수입에 눈이 밝고 그래서 성공한 영화사다. 국내 영화 제작 면에서는 그리 성적이 좋지 못하다. 이시영의 ‘언니’, 신현준의 ‘살수’를 만들었다. 최근엔 ‘1980’을 제작, 배급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2024.04.04 06:02
해외축구

독일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왜 국기 색상과 다를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은 주로 자국의 국기로부터 따 온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 중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신흥 강국 중에는 일본과 호주가 있다. 최근의 독일대표팀은 2018, 2022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연달아 실패하며 부진에 빠졌지만, 전통적으로 이들은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독일은 월드컵에 19번 출전해 8강 이상을 16번 기록했고, 결승전 최다 진출국(우승 4번, 준우승 4번)이다. 뛰어난 축구 실력과 더불어 독일대표팀은 아름다운 셔츠를 종종 선보이며, 글로벌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독일대표팀의 홈 셔츠는 흰색이다. 국기 색상인 검정, 빨강, 금색(노랑색이 아님)과 연관이 없다. 예전에 이에 관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지만, 필자의 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한다.키트 색상의 역사는 11세기 말에 시작한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많은 가톨릭 수도회가 생겼다. 수도회에 속한 이들은 수도자이자 기사였다. 이 중 대표적인 기사단이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이다. 튜튼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레반트 지역과 발트해의 기독교인을 보호했다. 튜튼기사단은 13세기 초반 발트해 남동쪽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웠다. 16세기 초반 기사단국은 세속 국가로 전환하며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1701년 왕국으로 승격한 프로이센은 1871년 분열된 독일 민족을 통일하며 독일 제국을 출범시켰다.독일 축구대표팀 키트의 색상은 1926년 이후부터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흰색 양말이 되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구성된 프로이센 국기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또한 프로이센의 국기는 튜튼기사단의 상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일팀의 홈 키트 색상은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했다.195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TV에서 축구가 중계되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한 팀이 파란색 다른 팀이 빨간색 혹은 검은색 셔츠를 입어도, 두 팀을 구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흑백 TV를 통해 경기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혼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색상(second color)’을 가진 어웨이 셔츠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계기다.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서독대표팀의 어웨이 셔츠는 녹색이었다. 이후 2000년까지 녹색이 짙어지거나 다른 색상과 혼합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녹색은 이들의 어웨이 셔츠 칼라였다. 축구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일대표팀은 자신들과 별 상관없이 보이는 녹색을 생뚱맞게 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럴듯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2차대전 후 전범국이 된 서독과 축구를 하고 싶은 유럽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아일랜드가 곤경에 빠진 서독에 손을 내밀어 경기를 갖게 된다. 이후 서독축구협회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상징 색상인 녹색으로 어웨이 셔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스토리는 오랫동안 사실처럼 축구팬들 사이에 떠돌았다. 심지어 현재 구글에서 검색을 해도 이렇게 설명이 된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현실은 주로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팩트를 얘기하면, 아일랜드는 서독과 축구를 처음 한 국가가 아니다. 전쟁 후 서독과 맞대결한 첫 번째 나라는 스위스였다. 1950년 11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서독과 스위스의 친선 경기에는 무려 10만 2000여 명의 관중이 모일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42년 11월 슬로바키아전을 마지막으로 8년 만에 열리는 국가대표팀 경기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서독의 1-0 승리. 서독팀은 1951년 4월 스위스와 리턴 매치를 했고, 6월 베를린에서 터키와 경기를 가졌다. 9만여 명의 관중이 모인 터키와의 경기 때 서독은 처음으로 녹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1-2로 패했다. 이후 서독은 오스트리아와 경기를 했고, 같은 해 10월 더블린에서 마침내 아일랜드와 대결해 2-3으로 졌다.그렇다면 녹색의 기원은 도대체 어디일까? 나치 시절의 독일축구협회(DFB)는 이니셜 D, F, B를 검은색, 흰색,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흑-백-적은 독일 제국의 국기색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이었고,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하며 부활시킨 색상이다. 종전 후 1949년 DFB가 재조직되면서 새 로고가 만들어졌다. 축구장의 피치를 상징하는 녹색이 협회의 시그니처 칼러가 되었고, 그린 색상의 어웨이 셔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독일 국기의 색상인 검-적-금이 DFB의 로고에 추가되면서, 어웨이 셔츠도 녹색 일변도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독일팀은 2002 월드컵에는 ‘두 가지 색으로 된 회색(two-tone grey)’, 2004 유로에는 검은색 어웨이 셔츠를 선보였다. 2006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때는 당시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의 강력한 제안으로 빨간색을 어웨이 색상으로 정했다. 많은 팬들이 익숙한 녹색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클린스만은 “적색 셔츠가 팀에게 심리적 우위를 주고, 행운을 가져오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클린스만의 기대와는 달리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평가전에서 적색 셔츠를 입은 독일팀은 1승 3패로 저조했다. 그나마 거둔 1승의 상대도 약체인 남아공이었다. 클린스만은 “월드컵 본선에서 가능한 자주 적색 셔츠를 입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독일대표팀은 2006 대회 때 치른 모든 경기에서 흰색 셔츠를 입었다. 참고로 독일이 월드컵과 유로에서 각각 4번, 3번 우승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흰색 홈 셔츠를 착용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3.01 15:00
골프일반

[뱁새 김용준 프로의 골프 모험] 스포츠에서 차별은 절대 안된다

영화 ‘레이스(Race)’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이다. 혹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받은 남승룡 선수 이야기를 담은 영화냐고?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레이스는 미국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Jesse Owens, 1913~1980)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제시 오언스는 베를린올림픽 육상 단거리에서 4관왕을 한 인물이다. 그는 100m와 200m 그리고 400m 계주와 멀리 뛰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사상 최초로 단거리 4관왕에 오른 것이다. 그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세운 100m 10초02와 200m 20초03라는 세계기록은 한참 후에야 깨졌다. 그는 흑인, 아니 아프리칸-아메리칸(African- American)이다. 그 당시 백인이 알파벳 ‘N’으로 시작으로 단어로 비하하던 그 인종 말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제목을 기가 막히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보통 지성은 아니다. 영어 단어 ‘레이스(Race)’는 ‘경주’라는 뜻이다. 스피드를 겨룬다는 뜻 말이다. 동시에 레이스는 ‘인종’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흑인이나 백인이라고 할 때 말하는 그 인종 말이다. 제11회 올림픽 개최지를 독일 베를린으로 결정했을 때 독일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미 유태인에 대한 억압을 시작한 때였다. 히틀러는 베를린올림픽을 독일 민족인 아리안인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자리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흑인과 유태인이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를 부렸다. 흑인이라고 썼다고 뱁새 김용준 프로가 인종차별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쓰자니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는 흑인을 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고심 끝에 어쩔 수 없이 쓴 단어이다. 독자가 마땅한 단어를 알고 있다면 귀띔해주기 바란다. 히틀러가 인종을 차별하는 무대로 만들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나라가 올림픽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히틀러도 결국 평등하게 치르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말만 그랬지 차별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이 아니라 일본인이 올림픽 대표로 나가기 바랐다. 그래서 추잡한 술수를 부렸다. 한번 대표 선발전을 치르고도 다시 2차 선발전을 치렀다. 2차 선발전에서 일본 선수들은 지름길로 달리는 반칙까지 저질렀다. 그런데도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각각 1위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남승룡 선수가 속임수를 쓴 일본 선수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아차, 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인종차별은 미국팀에서도 일어났다. 미국 육상협회는 400m 계주에서 유태인 선수 두 명을 뺐다. 기량대로라면 당연히 출전해야 할 선수를 말이다. 영화에서는 독일의 로비를 받은 미국 대표팀 단장이 그 결정을 주도했다고 풀어간다. 건축사인 그에게 베를린의 랜드 마크가 될 건물을 설계하는 일감을 주겠다는 제안으로 말이다. 주인공 제시 오언스 역시 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 갖은 인종차별을 이겨낸 것으로 영화에는 나온다. 현실에서는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골프 칼럼에서 인종차별 이야기냐고? 스포츠에서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을 독자와 나누려고 한 것이다. 차별은 혐오나 증오를 낳기 때문이다. 혐오와 증오는 전쟁처럼 상상도 하기 싫은 고통을 낳기 십상이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높아지던 몇 년 전이었다. 국내 골프장 한 곳이 ‘일본차는 골프장에 주차를 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잘 한 일이라고 응원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그 뉴스를 보자마자 뱁새 김 프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일본 업체가 만든 골프용품은? 골프 클럽이나 골프공 말이다. 다른 나라 업체가 만든 골프 클럽이라도 샤프트는 일본 업체 것을 끼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드라이버나 우드 샤프트에 쓰는 그라파이트(탄소섬유) 원단은 일본이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다. 독자가 아는 유명 그라파이트 샤프트는 대부분 이름이 알파벳 ‘M’으로 시작하는 회사가 생산하는 원단을 쓴다. 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살아본 독자라면 인종차별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듣고 본 경우도 많을 것이다. 막상 인종차별을 당할 때 느끼는 무력감은 말로 할 수 없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뒤돌아서면 증오가 된다. 뱁새도 미국 골프장에서 그런 인종차별을 당해보았다. 베를린올림픽 때 히틀러는 독일 골프 대표팀이 선두로 나섰다는 전보를 받았다. 히틀러는 특별 열차를 편성해 한참 멀리 떨어진 대회장으로 향했다. 직접 우승 트로피를 수여할 작정이었다. 당연히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온 세상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을 터이고. 그러나 대회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기적처럼 선전한 영국팀이 역전 우승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히틀러는 낙담하고 기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스포츠에 차별을 담으려고 한 비열한 의도가 꺾인 것이다. 영화 레이스의 주인공인 제시 오언스에게는 아리아인까지도 열광했다. 아리아인이 스타디움에 맨 처음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를 조선인 손기정이 깨뜨린 것도 스포츠 역사가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스포츠에서는 차별은 절대 안 된다. 그것이 인종이든 성별이든 종교이든 심지어 지역이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스포츠에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사람은 진정한 스포츠맨이 아니다. 골프는 스포츠이다. ‘뱁새’ 김용준 프로와 골프에 관해서 뭐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메일을 보내기 바란다. 지메일 ‘ironsmithkim’이다. 김용준 KPGA 프로 2023.11.08 07:31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리버풀 FC vs. 에버튼’, 비틀즈의 선택은?

리버풀은 잉글랜드의 북서부 머지사이드(Merseyside) 주에 위치한 도시다. 19세기의 리버풀 항구는 세계 물동량의 절반을 담당했고, 한때 리버풀은 런던보다 부유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석탄에서 석유로 산업 구조가 변하면서 도시는 빠르게 몰락했다. 21세기의 리버풀은 도시 재생 사업 등을 통해 암흑기에서 벗어났다. 경제적으로도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게다가 유럽연합이 리버풀을 2008년 ‘유럽 문화의 수도’로 선정할 만큼, 이 항구 도시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한다.리버풀은 음악과 축구의 진정한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이와 연관된 세계적인 브랜드 2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하나는 리버풀FC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밴드 비틀즈다. 따라서 이 두 브랜드가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은 비틀즈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반영하듯 구글에서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비틀즈가 리버풀FC를 지지했는지 여부다. 비틀즈 4명의 멤버는 모두 리버풀 출신이다. 축구의 도시 리버풀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 리버풀FC와 에버튼의 연고지다. 이 도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주로 하는 질문이 있다. “Are you a red or a blue?(당신은 레드입니까, 블루입니까?)” 즉 리버풀FC(레드)와 에버튼(블루) 중 누구를 응원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비틀즈는 과연 레드와 블루 중 누구를 사랑했을까?우선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1965년 빌 샹클리 감독의 리버풀은 FA컵 결승전에 올랐다. 이에 비틀즈는 멤버 전원의 이름으로 샹클리에게 전보를 보내 행운을 빌었다. 이 전보는 지금도 리버풀에 위치한 샹클리 호텔에 전시되어 있다. 1967년 비틀즈는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을 발표했다. 이 앨범 커버 삽화에 들어간 유명인 중 축구 선수는 리버풀FC의 공격수 앨버트 스터빈스(Albert Stubbins)가 유일했다. 커버에 삽입될 유명인 리스트를 결정할 때 링고 스타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 3명의 의견이 반영됐고, 존 레논이 스터빈스를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틀즈 역사학자 레이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스터빈스가 포함된 이유는 존보다는 리버풀 팬이었던 그의 아버지 알프레드 레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레논은 앨범 커버에 ‘예수 그리스도’와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도 포함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음반회사 EMI는 이 제안을 거절했는데, 예수의 경우 레논이 과거에 한 인터뷰가 큰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1966년 레논은 런던신문 이브닝 스탠다드와의 인터뷰에서 “대중이 예수보다 비틀즈에 더 빠져 있고, 기독교 신앙은 쇠퇴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이 발언은 영국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일부 라디오 방송국은 비틀즈의 음악을 틀지 않았고, 기자회견은 취소되었으며, 시위도 벌어져 밴드의 앨범을 태웠다. 이에 레논은 “자신과 밴드를 그리스도와 비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거듭 사과했다. 그러나 레논의 경솔한 발언은 결국 그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1980년 12월 비틀즈의 팬이었던 마크 채프먼이 레논을 향해 권총 4발을 쏜 것이다. 채프먼의 살인 동기 중 하나가 ‘레논의 신성모독’이었다.한편 비틀즈는 1970년 그들의 12번째 이자 마지막 앨범인 ‘Let It B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의 ‘Dig It’이란 노래에는 “Matt Busby, dig it”이란 가사가 있다. ‘Matt Busby(맷 버즈비)’는 리버풀FC의 선수였기에,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가설도 있다. 하지만 버즈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만든 감독으로 더 유명하다. 이렇게 추측만 있을 뿐 비틀즈가 레드를 응원했다는 구체적 물증은 없다. 게다가 비틀즈가 레드 혹은 블루를 지지한다고 밝히면, 라이벌 클럽 팬들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는 위험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대중의 기대와 달리, 정답은 ‘비틀즈의 멤버 4명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이다. 특히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이 여기에 속한다. 해리슨은 어느 팀을 지지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There are three teams in Liverpool and I prefer the other one(리버풀에는 세 팀이 있고 나머지 한 팀이 더 좋습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특정 팀과 연계되는 것을 피했다.흥미롭게도 링고 스타는 아스날 팬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링고는 런던 출신의 아스날 팬이었던 양아버지와 함께 리버풀에 원정 온 ‘거너스(The Gunners, 아스날의 애칭)’ 경기를 보러 다닌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링고도 열정적인 팬과는 거리가 멀었다. 폴 메카트니는 공개적으로 축구와 연관된 행보를 보인 유일한 비틀즈 멤버다. 가족의 영향으로 블루가 됐다는 폴은 어렸을 때 축구를 즐겼으나, 소질은 없었다.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던 폴은 TV로 축구를 보는 것은 즐기나, 열렬한 팬은 아니라고 밝혔다. 게다가 폴은 웸블리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리버풀 FC에서 선수와 감독을 지낸 케니 달글리시를 만난 이후, 레드도 응원하게 됐다고 한다. 폴은 기본적으로 블루와 레드 둘 다 응원하지만, 두 팀이 만나며 에버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비틀즈의 멤버 중 리버풀FC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밴드는 분명 축구에 열광하는 도시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비틀즈는 특정 클럽이 아닌 리버풀 도시 자체를 상징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3.09.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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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독일대표팀 유니폼이 십자군 복장에서 유래했다고?

각국의 축구대표팀은 다양한 색상이 들어간 셔츠를 입는다. 이들이 착용하는 셔츠 색깔은 주로 대표하는 나라의 국기에서 따 온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 중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여기에 속한다. 일본도 그들의 국기에 없는 파란색이 홈 셔츠에 단골로 들어간다. 축구팬이라면 3가지 색이 가로선으로 이루어진 독일 국기에 익숙할 것이다. 잠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보통 외국인들은 독일 국기의 검정, 빨강 밑에 있는 색깔이 노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랑처럼 보이는 이 색은 사실 금색이다. 독일에서는 금색이 아니라 노랑이라고 표기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형사처벌 받을 수도 있다. 흑-적-금인 삼색기는 1848년 3월 혁명 때 처음 등장했고, 1919년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삼색기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국기로 재지정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독일축구대표팀의 셔츠는 자국의 국기 색상과는 다르게 흰색이다. 무슨 연유로 이들은 흰색에 검은색이 보조로 들어가는 셔츠를 입게 됐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 년 전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여 년 동안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번에 걸쳐 원정을 갔다. 이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은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렸다. 십자군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많은 가톨릭 수도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수도자이자 군사적 의무를 맡은 기사였다. 대표적인 기사단으로는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 성요한 기사단(구호 기사단,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독일 기사단)을 꼽을 수 있다. 1099년 1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기사단은 레반트 지역에서 무슬림을 격퇴하고 그리스도교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다. 성모 마리아를 위한 독일 형제수도회는 1190년 왕국의 수도인 아크레에서 성지 순례를 하는 기독교인을 돕고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 조직원들이 바로 튜튼 기사단이다. 이들은 성지인 레반트 남쪽 지역과 발트해의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튜튼 기사단은 검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 옷과 가운을 입었고, 이러한 디자인과 색상이 그들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한 튜튼 기사단은 1230년 발트해 남동쪽 지역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운다. 튜튼 기사단의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는 가톨릭에 회의를 느껴 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고, 기사단국을 세속 국가로 전환시킨다. 이로서 알브레히트를 초대 공작으로 한 프로이센 공국이 1525년 세워졌다. 프로이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618년 연합했고,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한다. 프로이센(Preußen)의 영어 표기가 프러시아(Prussia)다. 프러시아는 러시아와 국명이 비슷하지만, 실제로 관련은 없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다. 분열된 독일 민족을 두고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서로의 주도하에 독일을 통일하고자 했다.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차례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1871년 통일을 이룩하며 독일 제국이 출범했다. 독일 제국의 국기는 검은색-흰색-빨간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였다. 현 독일 국기인 흑-적-금인 삼색기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면, 흑-백-적 국기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흑-백-적 국기를 부활시킨다. 1935년부터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국기로 지정하는데, 이 깃발에도 흑-백-적 색상이 들어있다. 독일축구협회는 1900년 설립됐고, 대표팀은 1908년 스위스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가졌다. 당시 대표팀이 입었던 셔츠는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프로이센 왕국의 깃발을 본떠 셔츠 소매는 흰색이고 몸통은 검은색이었다. 셔츠 가슴에는 흰색을 바탕으로 한 검은색 독수리도 들어갔다. 1926년 이후 독일대표팀 유니폼의 전형적인 색상은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흰색 양말로 자리 잡는다. 이 배색 조합 역시 프로이센 국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프로이센 국기는 튜튼 기사단의 상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독일축구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은 12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4.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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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전차군단' 독일대표팀은 왜 국가 부르는데 소극적인가?

유로(유럽축구선수권대회)나 월드컵 같은 국제대회를 통해 축구 팬들은 외국 국가를 들을 기회가 꽤 많다. 잉글랜드의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Queen)’, 프랑스의 ‘라 마르세예즈’ 이탈리아의 ‘마멜리 찬가’는 국내 축구 팬에게도 익숙한 노래다. 여기에 하나 더. 독일 국가인 ‘독일의 노래(Song of Germany, Deutschlandlied)’도 빼놓을 수 없다.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독일 국가의 멜로디는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 수 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4중주 ‘황제 찬가’에 가사를 붙였기 때문이다. 찬송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와 멜로디가 같기 때문에, 교회에서 들어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로 유명한 존 뉴턴이 하이든의 곡에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부를 만한 찬송가가 부족했다고 한다. 이에 널리 알려진 곡조나 민요 가락에 노랫말을 바꿔 붙여 찬송가를 만들었다. 이를 콘트라팍툼(contrafactum) 찬송가라 칭했고, 현행 찬송가의 모체가 된다. 하이든의 곡에 황제를 칭송하는 가사가 붙여져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우하소서'라는 이름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황실의 국가였던 이 노래는 19세기 중반에 새 가사가 붙여진다. 시인 팔러슬레벤이 같은 멜로디에 황제 대신 독일을 찬양하는 가사를 붙여 ‘독일의 노래’를 만든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독일에서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2년 독일의 노래를 국가로 지정했다. 하지만 1933년 등장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정부는 독일의 노래 1절을 제창한 후 나치당의 노래였던 ‘호르스트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를 이어 부르게 했다. 기존 독일 국가에 나치 당가가 합쳐진 혼합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2차 대전 패망 후 연합군 군정 기간에는 ‘나는 헌신했도다’가 독일에서 임시 국가로 쓰였다. 이 곡은 어여쁜 장미라는 이름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독일 민요이자 찬송가이기도 하다. 1949년 출범한 서독 정부는 예전에 사용했던 독일의 노래를 계속 국가로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1, 2절의 가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패배로 영토를 많이 잃은 독일은 1절 가사에 나오는 지명 상당수가 더 이상 자신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1절은 나치 독일을 연상시켜 터부시되는 분위기였다. 2절은 1절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가사와 술을 권하는 구절 등으로 인해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서독 정부는 1952년부터 3절만 공식 국가로 인정했다. 한편 동독은 ‘폐허에서 부활하여’란 이름으로 알려진 새 국가를 채택한다. 동독은 그들의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 서울올림픽에서 메달 순위 2위를 기록했고, 당시 서울에서는 동독 국가가 여러 번 울려 퍼졌다. 1990년 마침내 독일은 통일했다. 논의 끝에 통일 독일의 국가는 서독의 국가였던 독일의 노래로 결정된다. 독일의 노래는 19세기부터 널리 불린 역사적인 노래였기 때문에, 동독 지역 주민들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월드컵 같은 국제행사에서 듣는 독일 국가는 ‘독일의 노래 3절’이다. 하지만 네오나치 같은 극우 단체들은 집회에서 1절을 제창할 때도 있다. 독일대표팀은 그들의 국가가 연주될 때 어떤 모습을 보일까? 전통적으로 독일팀은 국가 제창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입을 다물고 있는 선수도 있고, 국가를 제창해도 나지막이 부르는 정도다. 이유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은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금지 됐다. 동서로 분열된 가운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서독이 우승했지만, 그들은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없었다. 전범국이라는 과거 때문에 서독에서는 애국심 표현이 자제됐기 때문이다. 통일 전 서독에서는 공공건물과 군복을 제외하면 국기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다르게 국기가 새겨진 자동차 스티커나 티셔츠도 없었다. 심지어는 1990년대에도 학교의 깃대에는 국기가 없었고, 학생들은 국가를 배우지 못했다. 이러한 독일이 2006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이들의 애국심 표현에도 변화가 시작된다. 특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통일 독일이 첫 우승을 거두자, 감격한 독일인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국기를 흔드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는 아직 독일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독일이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7-1로 대파한 후 트위터에는 ‘나치’ ‘히틀러’ 같은 독일과 관계된 부정적인 단어가 급증했다고 한다. 역사에 덜 얽매이는 젊은 세대와는 다르게 나이든 독일인들은 과거의 무게를 지금도 짊어지고 있다. 월드컵이 불러온 민족주의 쇼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은 거리에 만연한 독일 국기의 철거를 요구했고, 국가도 제창하지 않았다. 독일을 두 번이나 세계대전에 휩싸이게 한 국가적 자존심이나 민족주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독일인은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국가를 부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유산 때문에 이들은 영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애국심을 표현할 뿐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0.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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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스페인 선수들이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이유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같은 메이저 대회는 평소 축구에 별 관심 없는 사람까지도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경기에 앞서 두 나라의 선수들이 일렬로 서고 국가(國歌)가 연주되면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TV 화면은 그라운드의의 선수들, 벤치에 있는 코칭스태프와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 특히 국가가 연주될 때 그라운드에 있는 11명 선수의 표정을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선수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결의를 다지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 선수도 있다. 그에 반해 국가를 힘차게 혹은 나직하게 부르는 선수도 있고, 입을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이도 있다. 이렇게 같은 팀 내에서도 국가 연주 때 선수들의 반응은 다르다. 문화나 지역에 따라 선수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잉글랜드, 스웨덴, 덴마크, 독일과 같이 북유럽으로 분류되는 국가 선수들은 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국가를 따라 부른다. 그에 반해 남유럽 국가 선수들은 열정적으로 국가를 부른다. 비록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이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이들을 볼 수 없지만,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축구선수들보다 럭비선수들이 감정을 더 담아 국가를 부른다는 것이다. 격렬한 몸싸움이 중요한 종목의 특성상 럭비는 큰 체구를 가진 선수들이 많다. 이렇게 덩치가 산처럼 크고 약간은 무섭게 생긴 이탈리아 럭비대표 선수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실제로 우는 선수들도 있다) 감정을 힘껏 담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장관을 럭비 월드컵에서 연출하곤 한다. 같은 라틴계라도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완전히 다르다. 전통의 축구 강국으로 2008 유로, 2010 월드컵, 2012 유로를 연속 제패한 스페인 축구를 좋아하는 국내 팬들도 꽤 많다. 혹시 여러분은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스페인 선수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기억하나? 스페인 대표팀의 선수들은 국가 ‘La Marcha Real(왕의 행진곡, The Royal March)‘가 연주될 때 굳은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할 뿐, 아무도 이를 따라 부르지 않는다. 벤치에 있는 코칭스태프와 후보 선수들도 입조차 벙긋하지 않는다. 이를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2020 유로 준결승전에서 만났다. 당시 국가를 열심히 따라 부르는 이탈리아 선수들에 비해 스페인 선수들의 닫힌 입을 보고, 영국 상원의원 존 테일러는 트위터에 스페인 선수들을 조롱하는 글을 올렸다. 애국심이 없다는 것이다. 선수들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국가는 따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스페인 국가에는 ‘가사’가 없다. 스페인 외에도 3개국이 국가에 가사가 없다.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와 인구 3만의 소국 산마리노가 바로 그들이다. 1761년 발표된 스페인 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다. 당시 제목은 ‘La Marcha Granadera(척탄병 행진곡)’이었다. 근대 유럽 육군에서는 수류탄 던지는 것이 주 임무인 병사를 척탄병이라고 불렀다. 당시 수류탄은 크고 무거워서 이를 멀리 정확히 던지기 위해서 키가 크고 강인한 체격의 척탄병이 필요했다. 후에 척탄병이 사라진 후에도 이 용어는 정예부대의 대명사 같이 쓰인다. 스페인 사람들은 곧 척탄병 행진곡을 ‘왕의 행진곡’이라 부르게 된다. 왕실에서 열린 행사 때 이 곡이 주로 연주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가사는 없었다. 1936년 2월 총선거 결과로 공산당과 좌파가 연합한 인민전선 정권이 등장하자, 이에 반대한 우파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프랑코의 반정부군은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인민전선 정부군은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 1939년 3월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끝낸 프랑코는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독재자로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던 프랑코는 국가에 가사를 붙였다. 1975년 프랑코는 사망했고, 독재정권 잔재 청산을 이유로 스페인은 국가에서 가사를 없앤다. 한편 2007년 마드리드는 2016 하계올림픽 개최지 후보로 나서게 된다. 이에 스페인올림픽조직위원회는 국가에 가사가 필요하다고 느껴 전국적인 공모전을 통해 가사를 선정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여론의 강한 비판에 새 가사는 곧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공용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를 쓰는 이들도 꽤 많다. 이렇게 지역색이 강하고 분리주의 운동도 종종 일어나는 스페인에서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는 가사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국가에 가사가 없는 것을 선호한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스페인은 E조에 속해 있다. 독일, 코스타리카와 일본이 이곳에 있어 국내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조이기도 하다. 스페인 선수들은 이번 월드컵에도 국가 연주 때 조용히 있겠지만, 이 글을 읽은 독자분들은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침묵은 애국심이 없거나 귀찮은 게 아니라, 단지 국가에 가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8.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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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런던 축구팬 공공의 적, 토트넘

20개 클럽이 속한 프리미어리그(EPL)는 잉글랜드 축구리그 시스템의 최상위 단계다. 하위 리그인 2부(챔피언십), 3부(리그 1), 4부(리그 2)에는 각각 24개 팀이 속해 있다. 즉 1~4부리그에 속한 팀이 총 92개이고, 이들은 전업(full-time) 프로 축구 클럽이다. 92개 팀 중 2021~22시즌을 기준으로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클럽은 13개다. 이 중 아스널, 첼시, 토트넘, 웨스트햄이 런던을 대표하는 팀이다. 아스널, 첼시와 토트넘은 1992~93시즌 출범한 EPL 역사에서 한 번도 강등된 적이 없다. 1993~94시즌 EPL에 합류한 웨스트햄은 두 번의 강등과 승격을 겪으며, 26시즌을 이곳에서 보냈다.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를 기준으로 4개 팀의 순위를 매겨보자. 아스널은 47회 트로피를 들어 올려 런던팀 중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클럽 중에서는 세 번째로 우승을 많이 한 팀이 아스널이다. 참고로 잉글랜드에서 우승을 가장 많이 한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66회)이고, 다음이 리버풀(64회)이다. 토트넘은 잉글랜드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0~61시즌 더블(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1962~63시즌에는 영국(UK) 클럽 최초로 유럽대회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토트넘은 현재까지 2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오랫동안 런던에서 2인자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토트넘이 우승한 대회는 2007~08시즌 풋볼 리그 컵이 유일하다. 21세기에 토트넘을 추월한 팀은 첼시다. 구단주이자 러시아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첼시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덕에 런던 클럽으로는 유일하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첼시가 현재까지 들어 올린 트로피 34개 중에서 무려 21개가 아브라모비치 시절(2003~2022년) 얻은 것이다. 웨스트햄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3부리그로 강등당한 적이 없는 8개 클럽 중 하나다. 웨스트햄은 1965년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당시 주장이었던 보비 무어가 이 클럽 소속이었다. 하지만 1부리그에서 이들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3위(1985~86시즌)에 불과하고, 클럽이 들어 올린 트로피도 8개밖에 안 된다. 아스널, 첼시, 웨스트햄을 응원하는 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토트넘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손흥민의 소속 팀으로 최근 한국을 찾은 토트넘은 어떻게 런던 축구 팬 '공공의 적'이 됐을까? 물론 아스널 팬이 토트넘을 미워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런던 울위치에 있던 아스널이 1913년 북런던으로 이사하면서, 이들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시작됐다. 두 클럽이 벌이는 '북런던 더비'는 EPL 히트 상품 중 하나로 성장했다. 첼시와 웨스트햄의 팬들이 토트넘을 싫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비록 최근 성적은 다소 주춤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스널은 런던에서 제일 강한 팀이었다. 첼시와 웨스트햄 입장에서 아스널은 따라잡기 힘든 상대였다. 따라서 이 두 클럽은 토트넘을 잡아 런던의 2인자가 되고자 했다. 이에 첼시 팬들은 보통 아스널보다 토트넘을 더 싫어한다. 또한 첼시 근교의 풀럼과 퀸즈파크 레인저스(QPR)는 첼시를 지역 라이벌로 여기지만, 이들에게 관심 없는 첼시 입장에서는 라이벌로 보이는 토트넘이 싫은 것이다. 웨스트햄의 최대 라이벌은 밀월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 두 클럽이 같은 리그에 속한 적은 네 시즌밖에 없었다. 따라서 웨스트햄의 팬들은 대결할 기회가 제한적인 밀월을 대신해 같은 리그에서 자주 경기하는 토트넘을 제2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다. 특히 토트넘과 연고지가 겹치는 에섹스(Essex)와 북동 런던 지역의 웨스트햄 팬들이 토트넘을 더 미워한다. 118년 동안 토트넘의 홈구장이었던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의 스탬포드 힐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정통 유대교 공동체가 있다. 클럽은 오랫동안 런던 동북부의 유대인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930년대 토트넘 팬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사실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는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스널을 응원하는 유대인들은 중산층이었던 반면, 토트넘의 지지층은 노동자계급의 유대인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축구는 노동자들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토트넘은 유대인의 클럽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된 것이다. 이후 토트넘 팬들은 잉글랜드 내 경기와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1960년대 토트넘과 맞붙은 팀의 팬들은 반유대주의 구호인 “Yids”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에 토트넘 팬들은 자신을 "Yid Army(이드 아미·유대인 군대라는 의미)”로 칭했다. “Yid”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모욕과 차별에 맞선 것이다. 한편 첼시와 웨스트햄의 우익(right-wing) 성향을 가진 일부 훌리건들은 토트넘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도를 넘는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때도 있다. 이들은 경기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또한 “Adolf Hitler is coming for you(히틀러가 너를 잡으러 올 거야)” “I’d rather be a Paki than a Jew(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파키가 되겠어, Paki는 파키스탄 혹은 남아시아 출신을 비하하는 단어)”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토트넘 팬들을 모욕할 때도 있다. 현재 토트넘 팬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라고 한다. 즉 팬들의 절대다수는 유대인이 아니다. 아울러 요즘 경기장에서는 상대방 팀 팬들의 ‘Yid’라는 구호도 거의 안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Yid army”를 아직도 외치고 있는 비유대인 토트넘 팬들의 모순적인 행동에 반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토트넘의 1부리그 마지막 우승 연도는 1961년이다. FA컵 정상도 1991년 이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토트넘 팬들은 언제나 그들의 패배나 실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곤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우리가 이길 거야”라는 불굴의 태도를 갖는다. 지역 라이벌 팀 팬 입장에서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토트넘의 이런 정신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7.1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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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를 속여라! ‘민스미트 작전’ 실제와 싱크로율 200% 캐스팅

제2차 세계대전의 실제 작전을 담아낸 첩보 전쟁 블록버스터 ‘민스미트 작전’이 베일을 벗는다. 5월 12일 개봉을 앞둔 ‘민스미트 작전’은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뒤집은 세기의 작전을 담아낸 첩보 전쟁 블록버스터다. 런던 월드 프리미어 이후 로튼 토마토 신선도 100%를 기록하며 해외 언론의 호평을 받고 있는 ‘민스미트 작전’이 본격적으로 국내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시작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위엄이 느껴지는 각 잡힌 제복을 입은 인물들의 눈에 띈다. 찰스 첨리 역의 매튜 맥퍼딘과 이웬 몬태규 역의 콜린퍼스의 모습은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 이어 다시 만난 이들이 어떤 케미스트리를 보여줄지 기대감을 높인다. 이들의 진중한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어 ‘민스미트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영웅들이 드러난다. 제이슨 아이삭스가 연기하는 존 갓프리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켈리 맥도날드의 진 레슬리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니콜라스 로우가 연기하는 에인스워스 대령의 긴밀한 통화 장면은 이들의 작전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특히 콜린 퍼스는 런던 월드 프리미어 인터뷰를 통해 “내가 연기한 이웬 몬태규를 존경해왔다”라고 밝혀 그가 선사할 연기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매튜 맥퍼딘 역시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더 놀라울 것”이라며 전개를 향한 궁금증을 키웠다.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뒤바꾼 위대한 작전 실화를 담은 ‘민스미트 작전’은 5월 12일 국내 관객들을 찾아올 예정이다. 서가연 인턴기자 2022.04.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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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우크라이나에서 열렸던 죽음의 축구 경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불똥은 스포츠로도 확산되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러시아를 퇴출했다. 다른 종목도 동조하면서, 러시아는 스포츠계에서 ‘왕따’로 전락 중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 이 둘은 언제나 얽혀 있었다. 예를 들어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다. 우크라이나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축구를 통해 자긍심을 올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1922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에 통합된다. 소련은 1928년 이 지역의 민족주의를 탄압하며 많은 지식인을 처형했다. 1930년대 들어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농가는 식량을 모조리 뺏겼다. 그 결과 농업에 최적화된 토양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1932~33년에 걸쳐 ‘홀로도모르’라는 대기근을 겪는다. 이 기간에 무려 300만 명이 사망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소련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소전쟁을 일으킨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소련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나치에게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슬라브인들은 ‘운테르멘셴(Untermenschen, 열등 인종)’에 불과했다. 나치는 독립을 꿈꿨던 민족주의자 및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악명높은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등으로 보냈다. 소련을 침공한 지 3개월 만에 히틀러의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에프)를 점령했다. 나치는 풍요로운 삶에 대한 환상을 시민들에게 심기 위해 축구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언론인 게오르기 슈베초프는 루흐(Rukh)를 창단하고, 우크라이나 최고의 팀 FC 디나모 키이우 출신 선수들을 클럽에 합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루흐는 친 나치 단체였기 때문이다. 한편 디나모에서 뛰었던 골키퍼 니콜라이 트루세비치는 빵 공장에 취업한다. 옛 동료들도 그를 따라 합류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FC 스타트(Start)가 설립되었다. 이 클럽에 합류한 이들에게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좀 더 많은 식량과 훈련 시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스타트와 루흐는 각각 애국자와 나치 동조자를 상징하게 된다. 첫 경기에서 스타트는 루흐를 7-2로 완파한다. 이후 이들은 헝가리 군인 팀, 독일 포병 팀, 철도 팀 등을 상대로 6차례 대결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단순히 이긴 게 아니었다. 스타트는 7경기 동안 37골을 득점했고, 8실점만 했다. 나치는 이들의 뛰어난 성적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아리안 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하기 위해 독일 축구 최고의 재능이 모인 군인팀 플라켈프(Flakelf)와 스타트의 경기가 성사되었다. 1942년 8월 6일 열린 두 팀의 대결은 스타트의 5-1 완승으로 끝났다. 나치는 이념적 라이벌이자 열등 인족에게 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력을 보강한 플라켈프는 스타트와 8월 9일 재경기를 벌인다. 경기 전 게슈타포 장교는 스타트 선수들에게 오른팔을 드는 나치식 경례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전반전에 스타트는 3-1로 리드했다. 하프타임에 나타난 나치 장교는 이들에게 “오늘은 독일만이 이길 수 있다”라는 오싹한 메시지를 전한다. 후반전에 플라켈프는 동점을 만들어내나, 결국 경기는 스타트의 5-3 승리로 끝났다. 우크라이나가 점령군 독일의 파시즘에 이긴 것이다. 경기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승리에 고무된 관중들이 반 나치 구호를 외치며 열광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두려움에 떨었다는 상반된 설도 있다. 보복에 나선 나치가 선수들을 즉시 총살했다는 극단적인 설을 바탕으로, 이 경기는 훗날 ‘데스 매치(The Death Match)’로 불리게 된다. 특히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인민들의 영웅적인 행위라며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선수들은 훈장을 받았다. 3200만 명의 소련인이 이 경기를 다룬 영화 ‘세 번째 시간’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우크라이나의 역사가들은 데스 매치를 중립적 입장에서 조사했다. 독일 검찰도 관심을 보였다. 나치는 경기 후 9일이 지나 스타트 선수 9명을 체포했고, 이 중 5명이 나치 친위대 SS에 의해 살해된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의 처형은 나치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맞대결에서 벌어진 비극이지, 경기 패배에 대한 복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사실 스타트의 선수들은 처음부터 이 경기에 대해 언급하길 망설였다. 증언을 번복한 적도 있다. 두려움이 이유였다. “나치의 협력자로 보일까” “힘든 시대에 남들보다 덜 가혹하게 살았다는 비난을 받을까” “소련의 영웅주의 선전은 모순이다”라는 등의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소련이 주는 훈장을 거절한 한 선수는 훗날 “거짓말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전설이 진실보다 낫다면 전설을 인쇄하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사람들은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영웅이 나오는 동화를 선호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데스 매치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애국심과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3.0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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