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 왕` 김일 씨(78)는프로레슬링으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섰었다. 그래도 그의 몸에는 레슬링 못지않게 야구를 좋아하는 피가 흐르고 있나 보다. "레슬링을 하지 않았다면 야구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힐 정도다.
`일간스포츠와 함께하는 일본 대장정` 나흘째인 2일 오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제1라운드(아시아 예선.3~5일)에 출전하기 위해 도쿄돔호텔에 머물고 있는 한국 야구대표팀을 방문, 격려한 김 씨는 한동안 박찬호(33.샌디에이고)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너무 늦게 만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박찬호를 좋아하는 까닭은 뜻밖에도 단순했다. "미국에서 야구 선수로 대스타가 됐지 않았냐"며 "한국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정말 힘든데 장하고 대견스럽다"라고 말했다. 그 기세를 이번 WBC에서도 유감없이 발휘, "대만과 일본을 반드시 꺾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찬호도 인생은 물론 스포츠 분야의 대선배에게 한껏 경의를 나타냈다. 레슬링 후유증 때문에 각종 합병증과 씨름하고 있어 분명하지 않은 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경청한 뒤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김 씨는 또 "선동렬 감독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히며 선 감독(대표팀 투수코치)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는 "선 감독이 뛰는 경기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하지만 만난 것은 처음이다"며 즐거워했다. 선 감독도 "저도 어릴 때 경기하시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며 어릴 적 경외의 눈으로 쳐다봤던 거목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을 감격해했다.
■야구광이라 해도 좋아
김 씨의 `야구 사랑`은 대단하다. 이번 일본 방문에 동행한 부인 이인순 씨(60)가 "그분이 TV를 통해 보는 스포츠는 레슬링.야구.축구뿐이다"라며 "한때 국내 유명 선수들의 타율은 물론 투수 승수까지 줄줄 외우셨다"라고 전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날 만남을 지켜본 그의 후계자 이왕표 대한종합격투기협회 회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들이 (김일) 선생님께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이들이 진정한 스포츠맨이란 것을 느꼈다. 이들이 오늘 이런 자세를 보임으로써 자신들도 훗날 후배로부터 대우받는 것이 아닌가"라며 흐뭇해 했다.
이날 보고 싶던 야구 스타들을 만난 후 김 씨는 `야구의 추억`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그는 스승 역도산을 비롯,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99년 1월 작고) 등 동문들과 틈만 나면 역도산체육관 근처 고라쿠엔경기장으로 달려가 야구를 즐겼다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바바는 1950년대 말 일본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투수 출신이다. 야구에서 레슬링으로 종목을 바꾼 이유는 부상때문이었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팔목이 부러졌다.
그때부터 바바는 팔꿈치를 굽히지 못해 결국 야구를 그만뒀다. 그리고 역도산 권유로 레슬링에 입문했다. 이노키도 바바 못지않게 야구를 좋아했다. 김 씨는 "브라질로 이민 가육상(투원반) 선수로도 자질을 보였던 이노키는 팔목과 어깨 힘이 워낙 좋아 야구를 해도 대성할 선수였다" 라고 말했다. 김 씨는 "나와 스승님은 타석에만 섰는데 홈런성 타구를 여러 번 쳤다" 라며 당시의 추억에 젖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