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경기도 이천 김상철, 의정부 박영길, 부천 윤철, 평택 신동선, 천안 온양의 박경래 윤호연 등도 빈소를 찾아 큰 형님의 명복을 빌었다. 빈소 입구에는 약 200여개의 조화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의 조문행렬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원로급 주먹들이 분양소에 나타나면 검은색 정장 차림의 건장한 후배 10여명이 어김없이 동행했다. 조일환씨는 충남 지역 후배 50여명을 이끌고 조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조씨는 김씨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씨는 "태련이 형님은 늘 후배들의 안위를 걱정했다"면서 "본인은 몸이 아파 투석을 하면서도 후배들의 애경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창조씨는 "형님(김태련)이 갑자기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줄은 몰랐다"면서 "너무나 인자하고 자상하셨던 분이 별세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김씨는 서울대 상대 시절 좌익 척결을 위해 주먹을 휘두르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김씨는 62년 이정재가 군사혁명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돼 힘을 상실했을 때 '동대문사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씨는 "한번 협객은 영원한 협객이다. 절대 약자를 괴롭지 마라. 그것은 양아치가 하는 짓이다"라며 후배들에게 협객의 길을 강조했다. 후배 홍승문씨는 "여자와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조직에서 제명당했다"면서 "형님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괴롭히거나, 국가를 전복시키려던 좌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라고 밝혔다. 김씨가 속했던 동대문사단의 대표 주먹들은 깔끔한 매너로 다른 주먹들과는 차별을 보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김씨는 2004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택을 비롯해 전 재산을 사회복지센터 건립기금으로 내놓고 자신은 셋집 생활을 했다. 또 소년교도소를 방문, "한때 잘못으로 이곳에 왔다고 좌절하지 말라. 이를 악물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교화활동 및 봉사활동에 힘을 쏟았다.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여학생들이 지어줬다는 '낙화유수(떨어진 꽃잎이 물에 떠내려 간다)'라는 별명답게 김씨는 서울대 졸업의 학력,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세간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렸다.
김씨는 살아생전 왜곡된 주먹사의 한 단면을 지적했다.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고대생 습격 사건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김씨는 "고려대생 습격사건은 조직적·계획적 사건이 아니라당시 시위를 마친 고대생들이 조직원들을 폭행 이를 보복하려다가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씨의 후배 조병용씨는 "형님은 낙엽처럼 지는 운명을 예상했는지 최근 회고록을 집필중이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