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오은선 (한국 여성 최초)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그러나 당신의 오늘에 반대합니다. 이제는 더 큰 내일에 투자할 때.”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CF 중의 한 대목이다. 화면에 비춰진 만년설을 헤치며 걷는 모습이 거인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처음 오은선(40·155㎝)을 대했을 때 너무나 조그만 체구에 놀랐다. 이 몸으로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북한산 인수봉으로 향하며 ‘당신의 오늘’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들어보았다.
■인수봉이 지핀 등반의 꿈
초등학교 5학년 때. 오씨 가족은 도봉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북한산 인수봉. 작은 점들이 꾸물꾸물대며 오르는 것이 보였다. “와 재미 있겠다. 나도 크면 꼭 저길 올라가야지.”
바위를 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선망의 대상이 됐다. 휘경여중에 다니던 시절. 바로 옆 휘경여고에서 축제가 열렸다. 등산장비를 내놓은 진열대 앞에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잊고 있었던 초등학교 때의 인수봉이 떠올랐다. “이 장비들을 가지고 꼭 올라야겠다고 다시 다짐하게 됐죠.”
■무서운 바위의 유혹
대학(수원대 전산학과)에 들어가서 산악회부터 찾았다. 2학년 때부터 북한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수봉 앞에서 도저히 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그냥 캠프만 지키고 있었죠.” 하지만 혼자서 캠프를 지키다보니 너무 심심한 것이다.
선배에게 바위를 가르쳐달라고 졸라 드디어 인수봉 정상에 올랐다. “그때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바위 타는 재미에 흠뻑 빠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엄한 아버지가 외박을 허락하지 않아 산악회원들과 합숙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
하지만 3학년 때 드디어 외박이 허락됐다. 시산회에 참가하고 내려올 생각으로 올랐던 북한산. 그런데 시산회가 밤 12시에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산 속에서 잠을 자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두툼한 옷도 침낭도 없어 친구의 것을 빌렸다. 침낭을 빌려준 친구는 덜덜덜 떨며 잠을 청했다.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전하자 바로 그 다음날 침낭을 사오셨다. “외박에 대한 암묵적 허락이었던 셈이죠.”
■산을 향한 일편단심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공무원으로 취직. 산은 주말에 다니는 취미였다. 그러던 중에 에베레스트 여성 원정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원서를 넣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는데 합격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1993년 드디어 에베레스트로 떠났다. 직장엔 사직서를 남겨놓고 말이다. 원정대 중에서 지현옥(99년 안나푸르나봉 하산 중 사망)·최오순·김순주씨가 정상을 밟고. 오씨는 도전조차 못해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마음 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1년여 간은 등산장비 업체에서 일했다. 그 후에 눈높이 교사로 4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장기간 휴가를 필요로 하는 해외원정 때문에 다시 사직서를 써야 했다. 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등반을 하고 나서 2000년엔 평촌에 스파케티집을 열었다.
만만치 않은 해외원정 비용에 보탬이 될까 하는 마음에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건만 돈이 모이진 않았다. 이때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K2(8611m)에 오른다고 해 합류하게 됐다.
“식구들이 모두 산에 가서 쉴 때가 됐다고 격려하더라고요.” 식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많은 힘이 됐다. 2002년엔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5642m)를 완등하면서 본격적인 세계 7대륙 최고봉 도전이 시작됐다.
■7대륙 최고봉 완등에 마침표를 찍다
2004년 한 해에 5대륙 최고봉을 올랐다. 이로써 2003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에 이어 세계 7대륙 최고봉 도전을 끝마쳤다. 하지만 왈가왈부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세계가 인정하는 오세아니아 최고봉이 두 곳이기 때문이다. 2004년에 올랐던 호주의 코지어스코(2228m)와 인도네시아의 칼스텐츠(4884m).
칼스텐츠는 파피아뉴기니아와의 경계에 위치해 지리적으론 오세아니아주에 속하지만 인도네시아령이기 때문에 미묘한 부분이 된 것이다.
지난 3월 칼스텐츠 밑에까지 갔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OPM 반군의 활동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2월 재도전에 나섰다. 3월엔 밀림 지역을 택했지만 이번엔 광산 지역 쪽으로 향했다. 칼스텐츠로 향하는 길은 마치 게릴라 작전을 연상케 했다. 한밤중을 택해서 검은 복면을 하고. 라이터불로 신호를 보내며 전진했다. 고산의 위협이 아니라 총알의 위협을 마다않고 오른 험난한 길이었다.
“칼스텐츠에 올라섬으로써 7대륙 최고봉 완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죠.”
이제 꺼림칙했던 부분도 해결했으니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여성 산악인으로 원정대를 구성해 K2를 오르고 싶어요.” 오씨 앞에는 여전히 산이 놓여져 있었다.
■오은선은
2004년 12월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를 오르면서 한국 여성 최초로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게 된다. 첫 발은 1993년 에베레스트로 떠난 첫 해외 원정.
97년에 가셔브롬 2봉(8035m) 정상에 오르며 첫 8000m급 산에 올라선다. 99년엔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등반. 2002년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를 완등하면서 대륙별 최고봉 도전이 시작됐다.
2003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완등. 2004년 1월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2m) 완등. 5월 에베레스트(8850m) 국내 첫 여성 단독 완등. 8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963m). 11월 오세아니아 최고봉 코지어스코 등정에 성공한다.
올해엔 10월에 시샤팡마(8027m)를 무산소로 올랐다. 12월엔 오세아니아의 또다른 최고봉 칼스텐츠 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