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이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스포츠 역사학자마다 답변이 다르다. 1867년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1869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는 1879년이 시작 해라고 한다.
1867년은 프린스턴 대학이 풋볼 규칙을 만들어 처음으로 아메리칸 풋볼을 시작한 해다. 또 1869년은 럿거스대와 뉴저지 주립대가 새 규칙을 만들어 풋볼 경기를 치른 해다.
1879년은 예일대의 코치이자 선수였던 월터 캠프가 비교적 오늘날과 유사한 풋볼 규칙으로 경기를 한 해였다. 풋볼 연합이 결성된 1873년을 풋볼의 원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1876년에는 하버드-예일-럿거스-프린스턴-컬럼비아 등 5개 대학이 대학 풋볼 협회를 결성했다. 학자마다 이견이 있기 때문에 19세기 중후반에 아메리칸풋볼이 태동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풋볼의 확산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에 풋볼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동부에서 시작된 풋볼은 미국 중부와 서부로 알려졌다.
UC 버클리, 텍사스, 미시간, 미네소타 등이 19세기 후반부에 풋볼팀을 구성했다. 대학 풋볼이 큰 인기를 끌자 프로풋볼도 시작됐다.
여기서 프로 선수는 NFL과 같은 조직 안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돈을 받고 풋볼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뜻한다. 1892년 풋볼 클럽 두 팀의 대결에서 윌리엄 헤펠핑거라는 가드는 한 경기에 출전하는데 500달러를 받은 것으로 기록됐다.
정식 계약을 맺고 뛴 선수는 그랜트 딜버트로 (1893년) 계약서에 서명한 후 피츠버그 애슬레틱 클럽(PAC)의 소속 선수가 됐다. 풋볼 클럽이 인기를 끌자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피닉스 등지에서 프로 클럽이 창단했다. 1899년의 일이다.
▲풋볼의 발전 (20세기 초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풋볼 경기를 대중 스포츠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군인이었던 루즈벨트는 풋볼 선수 출신들이 용맹스럽다는 것을 알게 됐고 대통령이 된 후 이 스포츠를 장려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풋볼이 남자의 몸을 강하게 만들고 팀 정신을 갖게하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이는 "루즈벨트가 없었다면 오늘날 수퍼보울 경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풋볼의 대중화를 이끈 주인공이라고 설명했다.(자료 출처: The Roosevelt Rough Writer)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의 풋볼 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규칙을 개정해 신사적인 스포츠로 키울 것을 권유했고 1906년 그의 주도로 아메리칸 풋볼 규정 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는 풋볼 경기에서 전진 패스가 가능하도록 했고 공격권을 넘겨주지 않는 전진 야드를 5야드에서 10야드로 늘렸다. 또한 마구잡이 포메이션에 대한 규정을 강화했다.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스포츠였던 풋볼은 루즈벨트에 의해 '볼 만한 스포츠'로 발전했다. 당시 터치다운은 6점이 아니라 5점이었다.
▲프로 풋볼 리그의 발전(20세기 초중반)
꾸준히 인기몰이를 하던 풋볼은 프로풋볼이 활발하게 운영되면서 '미국의 스포츠'가 됐다. 20세기 초반 프로리그가 시작됐는데 리그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 후에 승전무드에 편승한 풋볼은 대학 경기뿐만 아니라 프로 경기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20세기 초반 형성된 NFL은 1940년 AFL이 결성될 때까지 주요 프로리그로서 힘을 얻었다. AFL이 등장한 후 양대리그는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경쟁으로 인한 출혈이 심각해지자 양대리그의 대표는 1966년 합병을 하기로 했다. 미 의회도 양대리그의 합병을 승인했다. 그리고 1967년 1월 제1회 수퍼보울(당시에는 월드챔피언십이라고 불렀다)이 열렸다. 장소는 LA 콜리시움. 당시 그린베이 패커스는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35-10으로 누르고 초대챔피언이 됐다.
1회 수퍼보울은 CBS와 NBC에서 동시 중계했다. 패커스는 2회 대회에서도 챔피언이 됐고 당시 이 팀의 감독이었던 빈스 롬바르디는 2회 우승을 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풋볼 인기 폭발(20세기 중후반)
풋볼의 인기는 대단했다. ABC 방송은 이를 간파하고 먼데이 나잇 풋볼(MNF)을 마련했다. ABC는 1970년, 1971년, 1972년에 월요일 13경기를 먼데이 나잇 풋볼로 방송했다.
MNF은 지금까지도 미국의 문화로 자리잡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시청률을 중시하는 공중파 방송들은 풋볼 경기 중계권을 잡아야 시청률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을 알고 거액의 돈을 NFL에 쏟아부었다. 돈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새로운 마케팅 기법이 계속 개발됐고 NFL은 거대리그로 발전했다.
1972년 제6회 수퍼보울 경기(댈러스 vs 마이애미)의 시청가구가 2천7백만이나 됐는데 이는 TV 시청률 최고 기록이었다.
▲대학풋볼 인기 동반 상승(20세기 후반)
대학풋볼은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는데 NFL의 인기가 치솟아 오르자 그 덕을 보기도 했다.
80-90년대 NFL이 호황기를 누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그 어떤 스포츠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자 대학 풋볼도 덩달아 최고 인기 스포츠 대열에 들어갔다.
대학풋볼은 8월 말 시작해 12월 초까지 팀당 11-12경기를 치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대학풋볼이 인기 있는 이유는 미래의 NFL 스타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매 경기가 플레이오프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에 있다.
대학풋볼에서는 1패를 당하면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또한 프로풋볼 구단이 들어가기 어렵지만 풋볼 팬이 많은 지역에서 대학풋볼의 인기는 그야말로 '넘버1'이다.
미국의 프로 스포츠에서는 시청률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은 시장'으로는 NFL팀이 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도시에서 대학풋볼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