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여행. 마음이야 느긋하게 한 박자 쉬며 천천히 가고 싶지만. 매일 매일 마주치는 색다른 풍경에 욕심은 많아지고 걸음은 빨라진다.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는데 자꾸만 뒤쳐져 따로 노는 몸. 여행에서도 때론 쉼표가 필요하다.
<여행자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늙으니까 돌아다니기도 너무 힘이 들어. ” 이집트의 다하브에서 만났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다. 젊었을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이 부부는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남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일년에 몇 달씩 여행을 하며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지만. 체력이 달리니 뭐 하나 즐기기도 쉽지가 않다고 한다.
매일 바뀌는 낯선 잠자리.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 보다 더 힘든 짐싸기(하룻밤을 자는데도 왜 이리 풀어야 할 짐은 많은 것인지). 몇 시간씩이나 걸리는 이동거리. 젊은 사람도 가끔씩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한 것이 여행인데. 두 손 꼭 잡고 다니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존경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H씨를 만난 후 너무 정신 없이 달린 탓일까?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헝가리로 오는 동안 온 몸은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으니 헝가리가 온천의 나라로 유명하다는 것. 뜨거운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상상만 해도 온 몸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동유럽의 휴양지인 발라톤 호수 근처에 호수 전체가 온천인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름하여 헤비츠 교기 온천. 중서유럽 최대의 온천 호수로 유명한 헤비츠는 ‘치료의 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관절염에 효능이 좋다고 하여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럽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었다. 3시간짜리 입장권(900Ft. 한화 약 4800원)을 끊어 입구로 들어가니 지하철 개찰구 같은 것이 보인다. 이 곳에 티켓을 넣으면 입장 시간이 표시되는 것. 수영복과 튜브를 빌려 곧장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인들처럼 대중목욕을 즐긴다. 호수 밑바닥에서 계속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나오는 헤비츠의 평균 수온은 25~35도. 입구에 오늘의 수온을 적어놓은 간판이 보인다. 관절염. 류머티즘 등 주로 뼈와 관련된 병에 좋다고 하다 보니. 온천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차갑다 못해 스산하기까지한 한겨울의 대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호수. 그리고 연꽃 사이를 유유히 헤엄쳐 가는 사람들의 풍경.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오랜만에 몸을 담근 탓일까? 한결 상쾌한 마음으로 동유럽의 보석이라 불리는 부다페스트에 입성했다. 이 곳에서 ‘왕 들의 와인. 왕 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토카이아수’를 만났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헝가리는 와인 생산국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나라다. 어부의 요새와 왕궁 등을 돌아보며 그저 그런 감흥에 젖어야 했던 우리에게 커다란 와인하우스 간판이 나타났다. 포도 재배부터 포도주 제조법까지 한 눈에 알 수 있다는 설명도 좋았지만. 와인잔 하나만 가지고 들어가면 원하는 와인들을 무제한 마셔볼 수 있다는 말에 더 솔깃해졌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입장료 앞에서 여행자는 가끔 필요이상으로 소심해 진다. 결국 시음을 포기한 채 눈으로 구경만 할 수 있다는 무료입장권을 끊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벽면 가득한 와인병과 어두컴컴한 실내를 감싸고 있는 와인 향기에 취해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체험에 목숨 거는 우리에게 눈 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포기하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해버리는 배낭여행자들이 많다.
넉넉지 않은 자금으로 장기 여행을 하는 경우 이런 일들은 더 흔해진다. 얼마나 아끼느냐에 따라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아끼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H씨.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자. J양의 얘기는 여기까지.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와인들을 보며 조금 전의 소심함을 원망하던 우리 앞에 잘 생긴 매니저 한 명이 나타났다. 헝가리 와인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는 것. 한참 동안 우리를 안내하던 매니저가 금빛이 도는 와인병 앞에 멈춰 선다.
헝가리 와인을 대표하는 ‘토카이아수‘는 꼭 한 번 맛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감미가 넘치는 화이트 와인으로 주로 디저트용으로 쓰이는 이 와인은 18세기 초 파리 사교계에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와인이 됐다. 별의 개수로 당도를 표시하는 이 와인을 이곳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매니저는 알고 보니 타고난 세일즈맨이었다.
한 번 마셔볼 수 있냐고 물어보니. 커다란 와인잔 두 개를 가져온다. 원래부터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내게 ‘토카이아수‘는 정말로 입에 딱 맞는 그런 와인이었다. 자. 이제 우리 수중에도 와인잔이 들어왔다. 무슨 얘긴고 하니. 이제 부터는 비싼 돈을 주고 입장해야 하는 유료 입장객들과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는 것.
‘토카이아수‘ 한 병을 구입하자 매니저는 다른 와인들도 시음해 보라며 와인잔을 아예 우리에게 건네준 것이다. 벽면 가득한 와인들을 실컷 마시고. 별 다섯 개짜리 ‘토카이아수’한 병까지 품에 안은 채 개선장군처럼 와인하우스를 나섰다. 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뿌듯함.
그날 저녁. J양과 나는 부다페스트 시내를 서성거리다가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조그만 선술집을 들어가 보았다.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헝가리 사람들의 테이블에는 맥주 보다 와인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와인의 나라답게 역시나 부담 없는 가격. 와인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밤을 찬양했다. 비싼 토카이아수는 배낭 속에 고이 모셔둔 채로….
<지친 여행을 달래주는 휴(休) 플레이스 best 5>
1. 영원의 도시. 인도 바라나시 인도에서도 가장 인도다운 곳. 전설보다 더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삶과 죽음의 의식으로 늘 소란스럽다. 이 곳에서 시간당 100루피(한화 약 2400원)면 장인 특유의 자존심과 고집으로 수천 년의 전통을 지켜온 인도 음악이나 요가 등을 배울 수 있다.
2.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면? 일본 아오모리 온천 일본의 전통 ‘료칸‘에서 하루를 보내보자. 딱딱하지만 운치 있는 다다미방. 오래된 칠기 가구를 쓰다듬으며 차 한잔을 마시는 여유. 지방의 미를 최대한 살린 정성스러운 음식. 소나무 소재의 천연 목욕탕과 자연 그대로의 노천탕 등 특급호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곰파에서의 하룻밤. 네팔 템플 스테이 서양 사람들은 왜 티베트 불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네팔에도 티베트 불교를 배우려고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든다. 티베트 불교만의 독특함을 느끼고 싶다면 곰파에서 진행하는 템플 스테이에 참여해 보자. 곰파는 티베트 불교 사원을 일컫는 말이다.
4. 느림의 미학. 라오스 방비엥 안개 낀 새벽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작은 마을. 하지만 이 마을엔 라오스 사람보다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더 많다. 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보는 청춘들은 햇볕이 나면 튜브 하나씩을 들고 쏨강으로 간다. 4시간 동안 유유자적 떠내려오는 튜브 타기 또는 카약킹을 즐기려는 것.
5. 풀코스 목욕서비스. 터키 하맘 때밀이 서비스와 커다란 대리석에서의 찜질. 건장한 털북숭이 사내들의 황홀한 비누 거품 목욕과 마사지까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특한 목욕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좀처럼 받기 힘든 풀코스 목욕 서비스가 하맘에 준비되어 있다.
<다음주 예고>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거쳐 터키에 입성한 H씨와 J양. 선정적인 드럼선율과 육감적인 벨리댄서들의 매력에 푹 빠진 디너쇼 현장. 화려한 몸짓의 초절정 섹시 댄스를 꼭 배우고야 말겠다는 J양의 무모한 도전이 이어집니다. 다음주> 지친> 있을>여행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