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이의 전성시대다. 몇 년 전만 해도 언더문화에 속했던 비보이를 요즘처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CF·드라마·뮤지컬 등 안 나오는 곳이 없다. 비보이를 빼고는 공연 문화를 논할 수 없게 돼 버렸다. 비보이는 이제 당당한 문화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30일에는 비보이 문화의 육성과 지원 방안을 주제로 국회 문광위에서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새로운 한류 주역 비보이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언더를 떠나 제도권으로 급속하게 편입된 비보이 문화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비보이 1세대와 2세대를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익스프레션과 갬블러를 집중 분석, 그 답을 구해 봤다.
"원래 꿈은 만화가였어요"
- 이우성 익스프레션 단장
비보이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도전일 것이다. 자신을 억누르는 기성 가치관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시대의 반항아 말이다. 그러나 이우성(31) 익스프레션 단장은 그런 상식을 깨는 모범생 비보이다. 춤으로 단련된 날렵한 몸매에 힙합 냄새 물씬 풍기는 복장에서 프로 춤꾼의 내공이 풀풀 풍겨 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보이 문화에 대한 비평은 제3자의 처지에 선듯 객관적이었다.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내성적 성격이라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만화 주인공들을 공책에 끄적거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숫기 없던 소년이 갑자기 춤바람이 난 것은 중학교 때.
"너무 평범한 게 싫었어요.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었죠" 처음엔 그 나이의 소년들이 그렇듯 튀어 보이겠다는 이유로 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소년에겐 자기도 몰랐던 재능이 숨어 있었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2년 SBS 꾸러기 콘테스트에서 연말 대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사회자는 최양락과 이봉원.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댄스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소극적 성격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의 반대는 없었을까? 의외였다. 댄스 인생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아버지 이준형(60)씨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댄서들의 춤을 찍어 오는 등 적극적으로 아들을 도왔다. 동생 이호성씨(익스프레션 팀장)도 형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1995년부터 비보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보잉 동작을 배우기 위해 서울 이태원의 문라이트클럽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 '현진영과 와와'의 리더 현진영도 '문라이트 키드'였다. 선배들의 춤 동작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몰래 비디오카메라에 담다가 들켜 몰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
1997년 마침내 비보이팀 익스프레션을 결성했다. 홍대 앞 클럽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익스프레션은 5년 만에 비보이계의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2002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우승했다. 아시아팀으로는 최초였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와 맞물려 비보이붐이 뜨겁게 불기 시작했다. 익스프레션의 우승 이후로 비보이 대회는 한국 팀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 정상과 함께 방황과 갈등의 길이 눈앞에 닥쳤다. 뭔가 또 다른 목표가 필요했다. 이번엔 비보이 공연 분야에 적극 뛰어들었다. 댄스팀 최초로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행사·퍼포먼스에 나서기 시작했다. 비보이를 젊은 시절 한때의 취미를 넘어선 어엿한 직업으로 정착시킨 데에는 그의 공이 크다.
"슈베르트 음악을 즐겨 들어요"
- 장경호 갬블러 대표
180㎝·75㎏의 단단한 체구가 중력을 잊은 듯 공간을 펄펄 누빈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전형적 비보이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지게끔 하는 남자. 장경호(24) 갬블러 대표는 야성미 물씬 풍기는 부산 사나이다. 어려서부터 유도·격투기·킥복싱에 빠진 무술 마니아다.
체육관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소년은 열 살 때부터 TV에 나오는 브레이크댄스에 흥미를 느끼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춤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뛰어난 운동 신경과 무술 수련때 익힌 덤블링으로 브레이크댄스를 제법 흉내 낼 수 있었다.
고교 때 또래들과 지하철역에서 춤을 추며 이름이 알려져 당시 부산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비보이팀 오보왕(한국 비보이유닛 1회 우승팀)에서 '용병 댄서'로 활동했다.
이때만 해도 격투기가 주된 관심사였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춤이 좋아졌다. 2002년도에 갬블러팀에 스카우트되었고 이듬해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에 출전했다. 3위에 그쳤다. 공연을 마치고 풀 죽어 나오는 그에게 배불뚝이 유럽 아저씨가 "유 아 더 베스트"라고 엄지손가락을 불쑥 내밀어 보였다. "그래! 우린 최고가 될 수 있어." 자신감을 얻었고 2004년 마침내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현재 방송통신대 4학년에 재학 중으로 다재다능하다. 프로 댄서라 그런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 힙합은 물론 재즈·클래식까지 즐겨 듣는다. 슈베르트를 특히 좋아한다. 그림 솜씨도 수준급이다. 갬블러 소개 팸플릿의 표지 그림도 그리고, 영상 다큐까지 직접 제작한다. 사진 촬영에도 관심이 많다. 복싱을 했던 아버지에게서 운동 신경을, 그림을 그렸던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끼를 물려받은것 같다고 한다.
브레이크 댄스 외에 가장 자신있는 것은 무엇일까? 팔씨름이다. 어려서부터 격투기와 비보잉으로 단련된 팔힘은 장난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교 형들과 겨뤄도 지지 않았다. 파워존이라는 팔씨름 동호회에서 랭킹 1위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역동작 프리즈의 비밀이 풀리는 듯하다. 꿈은 비보이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현재에 충실하다 보면 모든 게 잘되겠죠. 아직 젊은데 벌써부터 미래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제일 좋아하는 춤에만 미치고 싶다는 그는 내일보다는 오늘에 온몸을 던지는 진짜 비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