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노무현 대통령 뺨치는 베어벡의 언론 플레이
노무현 대통령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상상해보자. "올해 경제 성장률이 6%대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퇴하겠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국 경제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해낼 수 있다. 해내지 못한다면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만일 경제 성장률 6%를 이루지 못한 것이 외부 변수나 돌발 상황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판단되면 국민들에게 대통령직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겠다." 이걸 사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국면 전환을 위한 정치적 발언으로 생각해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축구의 대통령 핌 베어벡 감독은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아시안컵 4강에 들지 못한다면 사퇴를 고민하겠다"는 뜻을 외국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고, 6일 올림픽 대표팀의 UAE전이 끝난 뒤 인터뷰에서는 "박지성 설기현 이영표가 빠진 어려운 상황이지만 아시안컵은 우승이 목표다.
적어도 4강에는 들어야 한다. 4강에 들지 못한다면 내 발자취를 돌아볼 것이다. 내 실수가 컸다고 생각한다면 축구협회로 찾아가 다른 지도자를 찾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2일 네덜란드전에서 페널티킥을 허용한 것처럼 외부의 엉뚱한 요인 때문이라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베어벡 감독은 배수진을 치면서 몇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스스로를 더욱 비장하게 만들 것이며, 이는 선수단을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베어벡 발언이 나온 직후 열린 경기서 올림픽 대표팀은 근래 보기 드문 좋은 플레이를 펼치며 3-1 완승을 거뒀다.
사실 베어벡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시안컵 4강에 들지 못한다면 경질 압력에 시달릴 게 분명하다. 아시안컵은 베어벡 감독이 취임할 때부터 사실상 중간 평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미리 선수를 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베어벡 감독이 친 배수진에는 탈출구가 있다. 아시안컵 실패가 자신의 탓이 아니라 외부 변수라고 판단되면 사퇴 여부를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 한 점이다.
배수진이되 배수진이 아니고, 사퇴를 걸었지만 방패막이를 곁에 두고 있다. 이처럼 중대한 사항을 외국인 기자에게 슬며시 흘리고, 공식적인 기자회견서는 한 발 물러서는 모습도 매우 정치적인 제스처로 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베어벡 감독은 김두현에게 "그런식으로 공을 차면 성남에만 있어야 할것이다. 기용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고, K리그에 대해서는 "바보처럼 일정을 짰다"고 비난해 국내축구인들을 들끓게 했다.
박주영의 부상에 대해서는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 K리그 경기에 참가하고 소속팀 훈련을 했다"라며 FC 서울을 건들였다. 김태윤의 부상에 대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학범 감독이 나에게 불평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위를 건드렸다.
노무현 대통령 못지않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전까지 보여줬던 조용하고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격적인 화법 때문에 민심을 얻는 경우보다 잃을 때가 많았다. 베어벡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대전=이해준 기자 [hjlee@ilgan.co.kr]
사진=임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