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자 세상이 환해진다. 전교생 스무 명이 운동장에 오불오불 모여 고함을 지른다. 비 맞은 언덕의 풀꽃들처럼 아이들 모습이 터질 것같이 싱싱하고 탱글탱글하다. 내게는 저 아이들이 인생의 선생님이었다.”
언제까지나 나이를 먹지 않을 듯 보이던 동심의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예순 고개를 넘겼다. 고향을 떠나온 도시인들에게 형님처럼, 오랜 친구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푸근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가 이번엔 무너져 가는 농촌의 현실에 대해 약간은 씁쓸한 소회를 털어놓는다.
시인의 집은 어려서부터 사람 끊일 날이 없었던 ‘동네의 사랑방’이었다. 사람 속에서 나고 자란 그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섬진강 주변에서 살아온 친구들은 그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
산그늘이 앞뒤 산과 강을 건너 다니는 산골 마을에서 그들은 농사일 틈틈이 염소와 벌을 키우고,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고 ,곶감을 깎고, 알밤을 주워 살아간다. 살구꽃 피면 술 익는 마을이 한없이 따스하고 정겹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자본과 경쟁의 논리에 내몰려 하나 둘 고향을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의 삶은 전혀 앞날이 보이지 않고 추레하기 짝이 없다.
“아!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그의 아름다운 농사는 어디로 갔는가. 한 번도 꽃이 되지 못했던 저 유구한 농사꾼들의 삶은 어디로 사라져 가 버렸는가.”
“오랜 세월 고향에 사는 것이 기쁨이었으며 또한 고통이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고향 마을 언덕을 지켜 주던 소나무들이 팔려 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마을이 텅텅 비어 가고 부서져 간다. 세월은 우리들이 살았던 그 정다웠던 고향을 지워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살아왔던 세월은 흘러간 흑백영화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그 추억의 한 자락씩을 공유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시절의 아픔까지도 미소를 띠며 회상하리라. 그러나 무너져 가는 우리의 고향을 이렇게 속절없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김용택 지음, 푸르메, 1만 1000원.
●아마추어 정부의 몰락
일본 자민당의 황태자로 불리던 아베 정권은 내각 출범 직후 70% 이상의 지지율을 얻었지만 1년 만에 허무하게 침몰했다. 저자는 몰락의 원인을 정책 자체의 오류보다 정책을 만든 사람에게서 찾았다.
독불장군식 아마추어 측근 정치, 다시 말해 소통의 리더십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범하는 MB정부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우에스키 다카시 지음, 남윤호·이승녕 옮김, 중앙북스, 1만 5000원.
●여인들의 중국사
신선치마의 원조 조비연, 최악의 추녀 황후 가남풍, 티베트로 시집간 문성공주, 강희제를 성군으로 키운 효장태후 등 14명의 중국 여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정사와 야사 및 가족 연보 등 방대한 사료를 동원, 뛰어난 미모와 책략으로 천하를 치마폭에서 좌지우지했던 그녀들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왕번강 지음, 구서인 옮김, 김영사, 1만 3000원.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가수 김광석이 훌쩍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2년이다. 사진작가 임종진이 1993년부터 1000회 공연이 열린 1995년까지의 미공개 필름을 책에 담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여운은 길고 아름답다. 하회탈처럼 얼굴 가득 웃음을 띤 그의 모습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물씬 풍겨나온다. 임종진 글 사진, 랜덤하우스, 1만 3000원.
●처음 연애
김유정의 반어, 채만식의 풍자, 이문구의 입담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 김종광이 십대의 첫사랑을 옴니버스 소설로 묶었다. 4.19혁명과 전태일 분신 사건, 전교조 사태, 1988 서울 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등 1960년대부터 현대까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318의 사랑이 풋풋하고 발랄하다. 김종광 지음, 사계절, 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