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춘삼월, 불원천리 남도를 따라 흐르는 섬진강을 찾았건만 꽃소식이 없다. 지난해 이맘때는 매화며 산수유가 희고 노란 자태를 뽐내며 나들이의 흥겨움을 더해줬는데….
들녘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직도 봄은 멀어보인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탓이다. 그래서인지 전남 구례에는 두 계절이 아직 공존하고 있다.
너른 구례평야를 끼고 흐르는 섬진강은 봄맞이에 분주한 반면 지리산 3대 주봉 가운데 하나인 노고단은 겨울의 심술이 한창이다. 다행히 기온이 빠르게 오르고 있어 춘삼월의 '명예'는 지켜질듯 싶다. 지금 섬진강변을 달리면 차창 밖에서 흘러드는 바람은 온기를 가득 품고 있으며, 내리쬐는 햇살은 여지없는 봄날의 그것이다.
▲봄기운 가득한 섬진강 드라이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즈음, 잎을 모두 땅에 내려놓은채 벌거벗은 나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겨우내 잠자고 있는 대지 등 눈에 보이는 풍경은 썰렁하다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행을 즐기는 마니아는 이 때를 가장 좋아한다. 화가가 깨끗한 순백의 도화지 위에 물감을 칠하듯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은 '원초적 자연'을 통해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만나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들에겐 겨울을 보낸 우리 산하 어느 곳도 여행 명소가 된다. 특히 구례 섬진강변은 유달리 볼거리가 많아 인기다.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강변도로가 첫 손에 꼽힌다. 섬진강 드라이브는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교에서 경남 하동에 이르는 100리 길에서 이뤄진다. 벚꽃이 만발한 4월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대신 호젓한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다. 길 양편을 따라 벚나무가 빼곡히 터널을 이루고, 그 옆으로 푸른 물결을 말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섬진강이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어서다.
운이 좋으면 토지면 앞을 흐르는 지점에서 겨울을 나고 떠날 채비를 하는 민물가마우지를 만날 수 있다. 까만 몸집에 하얀 털로 머리를 장식한 민물가마우지 50여 마리가 강의 길목을 지키며 먹잇감을 찾고 있다. 구례군 관계자에 따르면 민물가마우지가 섬진강에 나타난 것은 올 겨울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만큼 강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해발 531m의 오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사성암에 이르면 구례를 관통하는 섬진강과 구례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시대인 544년 연기조사가 세웠다는 이 가람은 원효·도선·진각·의상대사 등 네 성인이 수도했다 해서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 초기 절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모시기 위한 본전은 최근 지은듯한 모습인데, 굵은 기둥에만 의지한 채 깎아지른 절벽에 지어진 건물이 마치 금강산 보덕암을 연상시킨다.
섬진강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운조루다. 조선 후기 전형적인 양반의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운조루는 영조 때인 1776년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집으로 230년이 흐른 지금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곳을 꼭 들러봐야 하는 이유는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유이주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설계도를 그린 다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운조루는 굴뚝이 마루 밑 축대의 구멍을 통해 마당으로 향하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밥을 지을 때 연기가 담 밖으로 나가면 백성들이 더욱 허기를 느낄 것을 염려한 것이다.
또 하나는 쌀을 담아놓는 뒤주. 아름드리 통나무 속을 비워 만든 뒤주 아래 직사각형의 작은 구멍을 막는 나무조각에는 '타인능해'라 씌여있다. 누구나 마개를 열어 쌀을 꺼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유이주와 그 후손들은 항상 이 뒤주에 쌀을 채워놓았는데, 눈에 띄게 줄지 않으면 식솔들을 닥달했다고 한다. 운조루가 인심을 잃어 백성들이 쌀을 퍼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운조루는 동학란·여순사건·한국전쟁 등 전란에서도 불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노고단은 아직 동장군이 주인
섬진강변이 완연한 봄을 향해 달린다면 해발 1507m의 노고단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옛날 지리산 산신할머니 선도성모를 모시는 사당 남악사가 있었다고 해서 노고단이라 불리는데, 일대는 남에서 올라오는 봄기운을 가로막은 채 겨우내 쌓인 눈을 아직도 품고 있다.
천은사와 뱁사골을 잇는 길이 열리면서 노고단은 이제 높이의 의미를 잃었다. 해발 1102m의 성삼재에 휴게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노고단까지 거리는 약 4.7㎞. 두 시간 남짓이면 다녀올 수 있다.
성삼재휴게소에서는 약간의 한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노고단 능선에 오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온은 말할 것도 없고, 짙은 구름을 몰고온 강한 바람이 사정없이 달려들어 체감 온도를 뚝 떨어뜨린다. 자칫 봄기운을 만끽하려 어설픈 복장으로 올랐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을 지경이다.
맑은 날에 노고단에 오르면 천왕봉까지 약 55㎞의 지리산 능선은 물론, 구례를 지나 광양과 하동을 가르며 뱀처럼 흘러가는 섬진강 전경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구례 10경 가운제 제1경으로 꼽히는 노고단 운해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년중 8개월 가량은 안개나 구름 속에 숨어버리는 까닭에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으면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따뜻한 봄날 겨울의 혹한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구례여행이 주는 또다른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