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안동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양대 축을 이뤘던 양반의 고장 경남 함양. ‘빛이 고루 비춘다’는 의미의 이름 탓일까. ‘계절의 여왕’ 5월의 첫날, 어디를 가도 따사로움이 가득하다. 가만히 햇살이 비추는 곳을 따라가니 병풍처럼 펼쳐지는 지리산 영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금대암을 만나고, 1000년의 세월이 빚어낸 숲길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상림이 마중한다. 함양에 가면 장대한 숲과 아기자기한 나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 가득한 지리산 영봉 숲을 보기 위해 금대산으로 길을 잡았다. 금대산은 함양 남쪽 마천면의 뒷산을 이루는 ‘작은’ 봉우리다. 해발 847m의 만만치않은 높이이지만 남쪽으로 해발 1500m가 넘는 영봉을 거느린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지리산 영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금대암이 있다. ‘금대’라는 암자 이름이 독특하다. 불가에서 금이란 부처, 대는 부처가 앉는 자리를 상징한다.
암자까지 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기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포장돼 큰 어려움은 없다. 금대암은 신라 태종무열왕 때 세워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 스님 한 분과 살림을 맡은 늙은 보살 한 분이 지키고 있는 작은 암자다.
암자에 마련된 작은 전망대에 서면 장관이 눈앞에 드러난다. 왜 금대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멀리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중봉(1874m)·하봉(1781m)·두류봉(1258m)이 왼편으로, 제석봉(1806m)·연하봉(1667m)·촛대봉(1703m)·영신봉(1652m)·형제봉(1433m)이 오른편으로 멋진 능선을 이루고 있다. 마치 연꽃의 꽃잎처럼 지리산 영봉들이 금대암을 에두르고 있는 것같은 형상이다.
경상남도·전라남북도의 5개 시군에 걸쳐 동서로 100여리나 뻗어있는 지리산의 영봉들을 이처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한 듯 싶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들어가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혜가 충만해지는 듯하다.
그 모습만으로도 감동스러운데 암자의 전망대 바로 아래 삐죽이 솟아있는 고목 한 그루가 운치를 더해준다. 푸른 대나무밭 사이로 짙푸른 자태를 뽐내는 나무는 수령 5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나무다. 전나무는 보통 25m 내외로 자란다는데, 금대암의 전나무는 키가 무려 40m에 이르러 신비로움을 더한다.
금대암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멋진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다. 건너편 삼정산(1242m) 능선에 들어선 도마리에 조성된 다랑논이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랑논에는 모내기를 앞두고 물대기가 한창이다. 경남 남해 가천마을의 다랭이논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확을 앞둔 가을이면 고개 숙인 벼가 보여주는 황금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인공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공림 상림 숲을 봤으니 이젠 나무를 만날 차례다. 국내에 조성된 인공숲이 여러곳 있는데, 대부분 재해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경남 함양의 상림, 남해의 물건방조어부림,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 인천 옹진군 영흥도의 소사나무군락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상림은 최고의 역사를 자랑한다. 신라 말기 지금의 함양인 천령군 군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이 마을을 가로지르던 위천의 흐름을 돌리기 위해 쌓은 강둑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나무를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1100년도 넘는다.
원래는 대관림이라는 이름으로 3㎞ 이상 뻗어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중간에 마을이 생기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고, 지금은 길이 1.2㎞, 폭 80~200m의 상림만 원형을 갖추고 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일단 숲으로 들어서자 서늘함마저 감돈다. 5월이 막 시작됐음에도 신록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느티나무·개서어나무·너도밤나무·상수리나무 등 잎이 큰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21㏊에 이르는 이곳의 개체수만도 120여종 2만여 그루에 이른다. 이들은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숲 속의 나무들은 언뜻 무질서해보이지만 제각각의 영역에서 조화를 이루며 공생하고 있다. 일부는 서로 영역다툼을 하다 한 몸이 된 경우도 있다.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엉켜있는데, 각기 다른 본성을 지닌 두 나무가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듯 보듬고 있다. 이처럼 몸통이 섞인 나무는 흔히 연리목이라 불리며 부부의 금슬이나 남녀의 애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두 나무는 오랜 세월의 고통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을 것을 생각하니 애처로움이 앞선다.
최치원은 나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숲 사이를 흐르는 개울도 만들었다. 지금은 그 물을 이용해 숲 바로 옆 논을 개조해 연밭 등 수변공원을 조성했는데, 여름이면 백련·홍련 등 다양한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최치원은 당시 몰락하는 와중에도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조정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 고장 태수를 끝으로 지리산에 은거, 최후를 마친다. 상림이 최치원의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상림에는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세운 ‘문장후 최치원 신도비’와 정자 ‘사운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