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의 장난일까, 아니면 인간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일까.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반도는 생김새부터가 유별나다. 사방을 둘러봐도 변변한 봉우리 하나 없는 한반도의 대표적 평야지대인 호남평야 한켠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에서 서쪽 평야의 끝, 그것도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이 변산이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하나의 산을 형성하는 다른 곳과 달리 변산은 해발 508m의 의상봉을 중심으로 4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이어지며 ‘작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직소폭포라는 멋진 보물을 감춰놨다. 장난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장관이고, 배려라 하기엔 너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변산은 산이면서도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산악지대인 내변산,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외변산으로 나뉜다. 예로부터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불릴 만큼 개성있는 절경을 갖춰 1988년 내·외변산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특히 내변산에는 월출과 낙조가 아름다운 월명암을 비롯해 천년고찰 내소사, 직소폭포에서 출발하는 봉래구곡 등이 절경으로 꼽힌다. 그중 굳이 서열을 매기라면 최고의 멋쟁이는 단연 직소폭포다.
직소폭포를 만나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내소사에서 출발해 관음봉을 거치며 변산의 속살을 더듬어가는 산행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내변산 깊숙이 들어가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트레킹을 겸해 다가가는 방법이다.
날씨도 흐린데다 워낙 고온다습해 산행을 포기하고 후자를 택했다. 변산면에서 내변산 방향으로 길을 바꿔 736번 지방도로로 약 10㎞쯤 가면 직소폭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난다. 여기서 300m쯤 들어가면 탐방지원센터 주차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출발점이다.
폭포까지는 약 2.4㎞. 탐방지원센터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길이 완만해 쉬엄쉬엄 걸어도 40분이면 폭포에 닿는다고 한다. 주차장을 벗어나 600m쯤 가니 실상사지라는 절터가 넓게 펼쳐져 있다. 신라 신문왕 때 지어진 유서깊은 도량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고 덩그러니 넓은 공지만 남아 있다.
숲으로 터널을 이룬 오솔길을 따라 다시 10분쯤 더 걸으니 갑자기 커다란 호수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호수는 규모는 작지만 양쪽으로 펼쳐진 푸른 숲과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직소보라 불리는 것을 보니 직소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놓은듯 싶다. 호수 주위를 따라 이어지는 길도 예쁘다. 나무 데크로 만들어졌는데,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시원하다.
호수를 벗어나면 숲 사이로 제법 굵직한 물소리가 들린다. 봉래구곡이다. 늦은 장마로 인한 높은 습도는 마치 사우나를 연상시킬 만큼 후텁지근하지만 푸른 숲과 싱그러운 물소리가 더위의 상당 부분을 덜어간다.
그 뒤에 나무 계단으로 이어지는, 약간 가파른 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은 구간이건만 무더위 때문에 발길이 조금은 무겁다. 계단이 끝나갈 무렵 묵직한 신음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려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신음을 탄성으로 바꿔놓는다.
믿기지 않을 만큼 장엄한 경관 때문이다. 멀리 짙은 숲 사이로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 바위 틈 사이로 굵은 물줄기가 굉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관광이 산업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 아래 앞다퉈 바로 옆까지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겨놓은 이름난 계곡의 폭포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용한 숲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는 장관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골 깊은 심심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서해안 바닷가에서 만날 줄이야. 다만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전망대는 오히려 경관을 해치는 ‘옥의 티’였다.
폭포 바로 아래까지 다가서면 더욱 볼만하다. 도끼로 찍어낸 듯 가파르게 서 있는 절벽을 가르고 쏟아지는 물줄기는 그 모습만으로도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주기에 충분하다. 안내판에 따르면 높이가 30m에 이르지만 주변에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어 실감하기 어렵다.
이 물줄기는 폭포 아래 실상용추라 불리는 깊은 소를 만든 후 흘러내려 제2, 제3의 폭포를 만들며 분옥담·선녀탕 등 봉래구곡이라 불리는 절경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