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컴퓨터 게임이 나오면서 미국과 일본 게임개발자들이 파고들었던 것은 러시아와 인도·중국의 설화였다. 한국 온라인게임의 선두주자인 ‘리니지’(엔씨소프트)와 ‘라그나로크’(그라비티)와 ’ 바람의 나라’(넥슨)는 모두 만화가 원작이다.
21세기는 ‘스토리의 시대’다.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 63개 언어로 번역돼 3억7500만권이 팔렸다. 영화나 게임 등 콘텐트 융합을 이끌어냈다. ‘아이온’(엔씨소프트)·‘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블리자드) 등 게임 또한 탄탄한 스토리와 세계관을 갖춰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스토리 좋은 게임 무조건 뜬다
세계관이 강조되는 MMORPG(온라인 다중 접속 역할수행게임)의 경우 유저들은 게임 내 각자 맡은 역할(직업)을 수행하면서 게임이 제시한 세계를 이해해 나가는 것이 기본이다.
성적과 승부 위주인 FPS(총쏘는 게임)나 캐주얼 게임과는 달리 MMORPG는 게임 내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최성락 동양공업전문대학 경영학부 교수는 “MMORPG는 서로 도와 주고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팀을 잘 짜서 다른 유저와 협조해야 집단적인 전투도 가능하고 레벨업이 가능하다”며 “게임은 상상력이 넘치는 판타지 세상이자 또 다른 삶이 거처하는 사회 교육장이다. 스토리가 재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전세계 1100만 회원이 즐기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블리자드)는 PC게임인 워크래프트 1~3시리즈의 시나리오와 세계관이 집대성됐다. 과거 자신이 즐겼던 게임의 자취와 줄거리를 재발견하는 재미와 함께 거대한 신화 속을 누비는 스토리의 연속성에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 온라인게임은 리니지와 리니지2 이후 5년 가까이 히트작 부재에 시달리며 위기설을 증폭시켰다. 그동안 ‘썬’(웹젠), ‘그라나도 에스파다’(한빛소프트) 등 많은 게임이 나왔지만 성적은 지지부진했다. 전문가들은 게임의 핵심 재미인 시나리오 부재가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한국게임 위기? 천만에 아이온을 보라”
한국게임의 위기설을 한방에 날린 게임이 바로 아이온이다. 아이온은 지난해 11월 공개되자마자 동시접속자 20만 명을 넘었고, 1주일 만에 유료화에 들어갔다.
6개월이 지난 5월말 현재 매달 1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대박신화’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에도 진출해 첫날 동시접속자 35만 명을 넘었고, 올해 안 100만 명 돌파가 예상되는 등 글로벌 흥행에도 성공했다. 아이온의 선전은 ‘스토리 좋은 게임은 무조건 뜬다’는 게임업계의 속설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이재성 엔씨소프트 상무는 “아이온이 천족과 마족 그리고 용족이 다투는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디테일하게 제작된 퀘스트 등을 통해 독특하고 거대한 세계관과 게임 재미를 어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동안 한국게임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스토리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 아이온의 제1의 성공비결이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문화와 창조·상상력을 중심으로 한 ‘제4의 물결’이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 중에서도 ‘스토리텔링’이 핵심키워드다.
영국 정부는 문화부 조직에 지난 10년 동안 308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해리포터’ 시리즈를 위해 전담부서까지 만들어 스토리 산업을 국내 총생산의 1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보일 정도다. 한국 정부도 60조원 정도인 콘텐트 시장규모를 2012년까지 100조원으로 늘려 5대 강국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이재웅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문화강국을 만드는 초석이 스토리텔링이다. 게임이나 출판·영화·애니메이션 모두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이를 도외시한 콘텐트 산업 육성은 모래성쌓기와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