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격 사유가 있는 인물이 천거됐고, 승인 여부는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됐다. 한 해 예산 140억 원인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일이다. 그 예산엔 정부의 지원이 없다.
이 조직의 사무총장 인사를 놓고 현직 정부 차관이 반대했다. 총재 선임시 두 달 공백이 있었고, 한 달 여 공백 끝에 야구 실무수반인 KBO 사무총장 선임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줄잡아 '한국 프로야구호'는 3개월간 뱃사공이 없었던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시계를 지난 겨울로 돌려 되짚어보자.
자진사퇴?
이상국(57) KBO 사무총장 내정자는 5일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자진 사퇴’는 말 뿐이다. 지난주 김대기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유영구 KBO 총재를 만나 “이상국씨는 안 된다”는 뜻을 전했다. 매우 강경한 어조였다고 한다. 문화부와 KBO의 갈등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종웅 전 국회의원이 신상우 전 총재 후임으로 거론되던 때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의원에게 KBO 총재를 맡겨달라는 전화를 청와대에 두 번이나 했다고 한다. 정계 움직임을 감지한 일부 야구계 인사들은 유영구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추대 운동을 벌였다. 유 이사장이 이명박 대통령 및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친분이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12월 16일 KBO 이사회는 유 이사장을 차기 총재 후보로 전격 추대했다. ‘낙하산 총재’에 대한 명시적인 거부였다.
문화부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유 이사장이나 박 전 의원 모두 간단하게 다룰 인물이 아니었다. 이사회 이틀 뒤 문화부는 '유감'을 나타냈지만 KBO 이사회는 새 총재 후보를 추대하지 않고 버텼다. 또 다른 소식통은 “당시 문화부가 유 이사장에게 대한체육회장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유 이사장이 거부했다”고 밝혔다. 박 전 의원도 끝까지 총재직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문화부는 2월 초 KBO 총재 선출 불관여 입장을 밝히며 두 손을 들었다. 유인촌 장관은 당시 인터뷰에서 “벼락맞은 격”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3년만에 재등장
이상국씨는 이 과정에서 유 총재의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문화부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다. 여기에 9~10대 사무총장 재임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예산 집행이 방만하다는 비판을 받는 등 결격 사유가 있었다. 총장 기용에 반대한 구단도 있었다.
KBO는 묘안을 냈다. ‘총장은 감독청의 승인을 받아 취임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정관 개정을 추진한 것이다. 이 경우 이상국씨는 아무런 제동없이 총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KBO가 정관 개정안과 총장 승인안을 문화부에 제출한 때는 5월 8일. 그러나 문화부는 승인안을 반려했고, '서류 미비' 등 이유로 개정안 승인도 미뤘다.
‘다른 사람을 총장으로 앉히라’는 의사 표시 첫번째였다. 유 총재와 이 내정자는 지난달 유 장관을 찾아 협조를 요청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김 차관은 지난주 유 총재에게 최종적으로 '이상국 불가' 뜻을 전했다. 문화부 뿐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 등 여권 실세들도 이 내정자 인선에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가 패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KBO 총재·총장 인선 소동은 정치권과 정부가 민간 체육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하는 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두 사안에서 정부는 절차나 대화보다는 '힘의 논리'를 앞세웠다. 유 총재 때는 아무런 근거없는 '사전 협의 부재'를 트집잡았고 이번엔 총장 승인안을 KBO로 돌려보낸 상태에서 현직 차관이 사실상 '승인 거부'를 했다.
KBO가 사무총장 인선 자율화를 추진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결격 사유가 있는 인물을 총장 자리에 앉히기 위해 자율성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상국 총장 선임에 대한 우려가 나왔을때 유 총재가 과연 이를 진지하게 경청했는지도 의문시 된다. 결과적으로 KBO는 자신이 ‘권력 앞에 자율적일 수 없는 기구’임을 자백한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