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면 제주로, 사람이 나면 서울로 새 학기가 시작되면 많은 학생들이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새로운 첫발을 내딛게 된다. 고등교육이 아직까지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이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제주도가 집인 학생도 마음만 먹으면 서울에서 집까지 몇 시간 안에 갈 수 있지만, 부모님 그늘을 떠나 생활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겨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주변 사람들이 위로하며 던지는 말이 ‘말이 나면 제주로, 사람의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 이다. 큰 인물로 키우려면 그에 맞는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말은 왜 제주로 보내는가?
- 귤 돌하르방, 그리고 조랑말
관광코스에 마차나 조랑말 타기가 포함된 것만 보아도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말이다. 제주와 귤, 제주와 돌하르방처럼 그냥 당연한 묶음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옛날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두루두루 쓰임이 많았을 말을 내륙의 다른 지역은 놔둔 채 굳이 멀리 떨어진 섬, 제주에서 키우고 배로 실어 나른다는 것이 불합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말 '원 간섭기'에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 웃을 수 없는 속담의 뒷이야기
당시 고려를 짓밟은 몽고인들은 일본 정벌을 준비하면서 지친 말을 쉬게 하거나 갈아 탈 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제주에 중간기지로 대규모 목장을 건설하고, 몽고에서 많은 씨 수말을 들여왔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도 터무니없이 막대한 수의 말을 조공으로 요구하곤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조선 조정에서 제주도 목장 폐지론이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말들에게 먹일 초지를 조성하기 위해 엄청난 산림을 불태웠다. "말이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 속에는 아픈 과거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 개.소.당나귀 모두 꿇어
옛날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말은 그 기능과 가치가 가축 중에서 으뜸이었다. 그 때문에 고사성어와 속담에서 중요한 것, 귀한 것의 의미로 말이 자주 등장한다. 말 신을 소에게 신긴다', '개발에 편자'는 비슷한 의미의 속담으로 쓸 데 없는 일이나 격에 맞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또 '말 갈 데 소 간다'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열심히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갈 곳이 따로 있는데 아무 곳이나 마구 다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또 "마방이 망하려면 당나귀만 들어온다"는 말은 사업이 안 되려니 무익한 자들만 찾아온다는 의미다. 이처럼 유용한 가축으로 꼽히던 개·소·당나귀마저 말과 비교당하며 순식간에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니, 그 신분 차이의 높은 벽을 실감할 만하다.
- ‘놓아먹인 말’은 버릇없는 사람
"말은 달려 봐야 알고, 사람은 친해 봐야 안다"는 말처럼 대인관계에서 기억해 두면 좋을 속담도 많다. 사람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 그 능력이나 됨됨이를 알 수 없다는 뜻인데, 겉모습만으로 쉽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요즘에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또 "무는 말이 있으면, 차는 말도 있다"는 말은 어느 곳에 가나 별별 사람이 다 있다는 의미로, 사람 각각의 개성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속담이다. 이밖에 버릇없는 사람을 가리켜 ‘놓아먹인 말’이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을 말에 비유해 성격이나 습성을 표현한 경우다.
사람 사이에 존중과 칭찬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말도 용마(龍馬)라면 좋아하고, 소도 대우(大牛)라면 좋아한다”나 나쁜 사람에게는 특별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사나운 말에게 무거운 길마(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 지운다"와 같은 훈계적 내용의 속담도 있다.
- 귀한 말을 품은 오래된 말
이렇듯 옛 격언에 말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람과 가깝게 지낸 까닭도 있겠지만 사람과 비교될 만큼 영특하고 귀한 존재로 생각됐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말 한 마리의 가치가 노비 두세 명과 비슷했다고 하니 키우던 말이 망아지를 낳기라도 하면 집에서 자식을 낳은 듯 기뻐하고 애지중지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말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다른 가축보다 귀한 존재로 격상시키고 사람에게까지 비유한 속담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귀한 말(馬)을 품은 오래된 말(言)들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