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는 프로 원년인 1982년부터 타국 리그의 우수선수를 '수혈'해 리그를 시작했다. MBC의 감독 겸 선수인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타격왕 출신이었고, MVP 박철순(OB)은 마이너리그에서 뛴 뒤 귀국했다. 두 사람은 각각 4할 타율과 22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1983년부터는 재일동포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기 시작했다. 삼미가 장명부와 이영구, 해태가 주동식과 김무종을 영입했다. 당시는 KBO와 일본프로야구(NPB)가 선수계약협정을 맺기 전. 현역 일본 구단 소속 선수의 영입은 '선수 강탈'로 비춰질 수 있었다. 실제 일본 승률왕 출신 장명부 영입 당시 일본 언론은 "KBO가 선수를 훔치려 한다"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KBO 총재 특별 보좌역이던 장훈씨의 중재와 양국 야구기구의 협력 분위기 조성으로 문제는 무난하게 해결됐다.
재일동포 선수는 초창기 프로야구의 선수난 해결과 수준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1984년 김일융의 삼성 입단은 이건희 구단주가 직접 요미우리 그룹에 부탁해 이뤄졌다. 그러나 1980년대 23명에 달했던 재일동포 선수 수는 1990년대 8명으로 줄어든다. 8명 가운데 주전급으로 뛴 선수는 김실(전 삼성·쌍방울) 정도다. 국내 선수의 수준 향상 및 1985년 이후(플라자 합의) 엔화 가치 상승 탓에 수준급 재일동포 선수가 영입되지 못했다.
국내파 일색이던 프로야구는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 시행으로 다시 변화를 맞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홈런의 증가다. 1997년 0.8개던 경기당 홈런은 이듬해 0.9개로 증가했고, 1999년엔 1.2개로 늘어났다. 1999~2003년은 프로야구에서 가장 홈런이 많았던 시기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선수 수입과 함께 찾아 온 스테로이드 등 약물 복용을 그 이유로 꼽는다.
2007년 KBO가 도핑테스트를 도입한 뒤 외국인 선수 수급 구조에도 변화가 왔다. 1998~2000년 외국인 타자는 44명으로 투수 수(13명)의 세 배 이상이었다. 2001~2006년에는 투수 88명·타자 71명으로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2007~2010년에는 투수 70명·타자 21명으로 역전됐다. 올시즌에는 전체 외국인 선수 23명 가운데 타자는 두 명 밖에 없었다.
투수 품귀 현상은 구단들이 일본(카도쿠라·오카모토) 쿠바(부에노) 등으로 '수입선'을 다각화하는 동기가 됐다. 연봉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만프로야구(CPBL)가 올해부터 FA 및 해외진출 FA 제도를 적용함에 따라 대만은 새로운 선수 공급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판웨이룬 영입 시도는 그 신호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