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엄앵란이 스파이가 된 적이 있다. 내 최대 히트작인 영화 '맨발의 청춘'이 스파이 작전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작품이 바로 1963년작인 '청춘교실'이다. 조선일보는 이 무렵 광화문 사옥 바로 옆에 운영하고 있던 시네마극장을 한국 영화 전용극장인 아카데미극장으로 바꾸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전무는 김연준 한양대 총장에게 연극영화과와 영화사를 설립해 아카데미극장 개관 영화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바람에 생긴 영화사가 한양영화사였다. 이 영화사는 아카데미극장 개관 프로그램으로 일본 작품이 원작인 '청춘교실'을 기획했다.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등으로 청춘물에서 입지를 굳힌 나는 엄앵란·최지희·남미리·방성자 등과 함께 캐스팅됐다.
'청춘교실'은 대학교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청춘물이었다. 김수용 감독은 촬영 무대를 건국대 캠퍼스로 잡았다. 당시 캠퍼스 안에 호수가 있는 학교는 그 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발랄한 젊은이들의 상을 그려 크게 히트했다.
아카데미극장은 이 영화로 인해 청춘영화 전용극장의 효시가 됐다. 이 극장은 로비가 긴 복도로 되어 있고, 그 양쪽을 열대어 수족관으로 장식한 인테리어로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열대어를 구경하면서 15m 이상 걸어서 들어가야 했으니 장안의 명물이었다. 한양영화사는 '청춘교실'을 히트시킨 상황에서 또 다른 청춘영화를 아카데미극장에 걸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청춘교실'로 인연을 맺은 한양영화사의 최모 기획실장이 나와 엄앵란을 불러 식사를 사며 차기 작품에 대한 구상을 들려주었다. 훗날 '맨발의 청춘'이 된 기획이었다.
"일본에서 히트한 작품이 있어. 남자는 뒷골목 젊은이고, 여자는 대사의 딸이지. 결국 두 사람의 자살로 끝나는 작품이야. 딱 둘이서 하면 되겠다."
일본 원작의 제목은 '맨발의 청춘'이 아니었다. '맨발의 청춘'이란 제목은 최 실장이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었다. 선배 격인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들려준 것일 뿐, 이 작품을 회사에 정식 제안하진 않은 상태로 보였다. 나와 엄앵란은 이미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 각 영화사의 분위기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가정교사'로 극동흥업, '청춘교실'로 한양영화사의 분위기를 직접 비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영화사는 극동흥업이라고 생각했다. 한양영화사는 규모만 클 뿐, 작품을 알차게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했다. 극동흥업은 김기덕이란 유망 감독을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
내 생각을 엄앵란에게 이야기했더니, 엄앵란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기획을 극동흥업에 넘기기로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기획에 깜짝 놀란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은 우리 말을 대번에 알아 들었다. 곧바로 '가정교사'를 각색한 서윤성 작가를 중심으로 대본 입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맨발의 청춘' 시나리오는 그 다음날로 극동흥업에 들어왔다. 이 영화는 일본의 4대 메이저 컴퍼니 중 하나인 니가츠(日活)사 작품이었는데, 서 작가가 일본의 라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극동영화사는 기획과 동시에 발빠르게 촬영 작업을 시작했고, 결국 '맨발의 청춘'은 극동흥업의 작품으로 64년 초 아카데미극장에 걸렸다.
만약 최고 히트작이 된 '맨발의 청춘'이 한양영화사로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나름대로 성공한 스파이 작전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