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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 큐] 229. 잠실땅을 사세요
80년대 초반 후암동엔 재벌집 사모님들이 방문이 잦았다. 남산에 재벌들이 많이 살아선지 소문을 듣고 용케도 나를 찾아왔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의 안주인인 그녀들은 자신의 신분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 분들 중 A기업 사모님도 있었다. "저희는 세 자매인데 모두 좋은 데로 시집을 갔어요. 큰언니는 K그룹, 둘째언니는 J기업, 저는 이집에 시집오게 됐죠." 누가 봐도 부러워할 최고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딸 셋을 키운 친정어머니의 마음고생은 심했다. 딸밖에 낳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들을 낳는다는 모든 비방은 다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친정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절에서 달랬다. 훗날 딸들이 크게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큰 공양도 자주 하셨다. 덕분에 딸들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대한민국 일등 명문가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처럼 흥하진 않지만 말이다.
A기업 사모님은 회사 제품인 빵·과자를 한보따리 가져왔다. 그녀에겐 큰 고민이 있었다. 80년대 점점 라이벌인 B기업과의 경쟁이 심해졌다. "저희 남편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그녀가 가져온 과자를 먹으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도태되고 만다. 그 당시 A기업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문제는 기업 총수가 너무 아버지의 업적을 능가하려는 열정이 지나쳤다는 점이다.
한 기업의 운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다. 대개의 재벌들이 한때의 영광을 누리다 갑자기 쓰러지는 것도 혜안이 부족해서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 혜안을 빌려주기로 했다.
그즈음 대대적인 다각화를 계획하고 있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꾸준히 계승하세요. 대신 잠실과 인연을 가지세요. 앞으로 잠실이 크게 흥할 겁니다. 무조건 잠실에 큰 땅을 사세요."
"잠실이요?" 그녀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금은 잠실 주요요지가 A기업의 라이벌 회사였던 B기업 소유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가지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너른 텃밭이었다. 나는 재차 강조했다. "앞으로 잠실에 큰 개발이 시작됩니다. 잠실을 터전삼아 백화점, 호텔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세요."
하지만 A기업은 끝내 잠실과 인연을 갖지 못했다. 몇몇의 잠실 땅을 샀지만 라이벌 회사인 B기업에게 모두 뺏기고 말았다. 또 내가 충고했던 백화점, 호텔 사업보다 스포츠나 전자사업에 투자해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결국 2005년 인수합병의 길을 걷게 됐다.
90년대 말 IMF시절, 모자동차기업 회장이 특수강사업 확장을 문의했을 때 나는 내일처럼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그 분은 결국 특수강회사를 세웠고, 굴지의 기업이었지만 얼마 안가 도산의 길을 가고 말았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나의 충고를 들었다면 지금 쟁쟁한 회사가 되었을까. 나는 그렇다고도, 안 그렀다고도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비록 정해졌다 해도 내 걱정이 지나쳐서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