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경기 시작 전 더그아웃에서 휴식 중인 선수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구단 관계자의 모습이다. 관계자의 손에는 새 야구공이 가득 든 상자가 들려있다. 굵은 사인펜을 받아든 선수는 익숙하게 이름 석 자를 적어 넣는다.
▶롯데·한화의 '원톱' 이대호·류현진"아유~말도 말어. 나도 현진이 사인 줄 서서 받는다니까." 지난 4월 목동구장 더그아웃에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한화 간판 투수 류현진 앞으로 사인을 요청하는 줄이 길게 늘어섰던 것. 그런데 '몰려든 인파'의 면면이 심상찮았다. 일반 팬은 없고 구단관계자와 상대팀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것. 그중에는 "아들! 나 사인 한 개만 해줘"를 외치는 아버지 류재천 씨가 있었다. 류 씨는 "친한 친구들 부탁을 많이 받는다. 고르고 골라서 들어주는데도 많다"면서 "아들이지만 나도 현진이 사인받기 어렵다"며 밝게 웃었다.
한화에서 사인 인기가 가장 많은 선수는 역시 류현진. 김용동 한화 홍보팀 대리는 "간판 선수 아닌가. 많을 때는 하루에 야구공 10상자씩 한다. 한 상자에 공이 12개씩 들어있으니 120개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나름의 철칙은 있다. 등판을 앞둔 날에는 절대 사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 혹시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어서다. 김 대리는 "최근 들어 '야왕'으로 등극한 한대화 한화 감독 사인 요구도 부쩍 늘었다"고 덧붙였다.
롯데는 역시 이대호다. 롯데 관계자는 "스타가 많은 팀이지만, 이대호를 따를 사람이 없다. 사인공뿐만아니라, 유니폼이나 배트까지 소품도 다양하다. 하루에도 여러번 찾아가 사인을 받는다. 구체적으로 집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정확한 숫자는 본인만 안다. 이대호는 "한창 때는 하루 400번 사인한 적이 있다. 요즘 들어서는 사인을 하루 최대 200개 정도로 자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경기 전 사인을 많이 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더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사인공에도 스테디셀러가 있다성적 좋다고 사인공 인기도 1위는 아니다. 은근한 장작불처럼 끊이지 않는 수요를 자랑하는 선수도 있다. KIA 프랜차이즈 스타 이종범은 사인볼 '스테디셀러'로 손꼽힌다. 이석범 KIA 홍보팀 대리는 "우리 팀 '사인왕'은 이종범이다. 광주지역은 물론, 어디를 가도 인기가 꾸준하다"고 했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이후부터는 윤석민과 이용규을 향한 사인 공세가 부쩍 늘었다.
선수보다 '코칭스태프'인기가 더 많은 팀도 있다. 넥센이다. 김기영 넥센 홍보팀장은 "사인볼 요청이 들어오면 보통 30%이상은 김시진 감독을 찾는다. 그 다음이 정민태 투수 코치다. 어떻게보면 선수보다도 많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많은 팬을 거느렸던 현대시절에는 이숭용의 인기도 대단했다. 잘생긴 외모로 여심을 사로잡았던 그는 지금 이대호 못지않게 많은 사인을 했다고. 밀려드는 사인요청을 모두 수용하느라 당시 현대에는 이숭용의 사인을 똑같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세 명 정도 더 있었다. 이후 이숭용의 사인공 지론은 이렇다. "내가 직접 눈 앞에서 사인하는 것 보지 못했으면 믿지말라."
서지영 기자 [saltdol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