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이 지내면서도 안타깝게 생각한 커플이 있다. 작곡가 이봉조(1931~1987)와 가수 현미다.
이들과의 인연은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봉조는 최희준이 부른 '맨발의 청춘' 주제가를 작곡해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어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최희준의 '종점', 정훈희의 '안개' 등 주옥같은 곡들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내가 본 이봉조는 천재였다. 작곡가들이 즉흥적으로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이었지만 작곡할 시간은 더욱 짧았다. 미8군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 번 '빠앙 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
이봉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대학시절 건축과(한양대) 출신으로 6인조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고, 서예의 달인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현미가 TV프로그램에서 수없이 밝힌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미8군 공연을 하며 만났다. 이봉조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현미가 임신 7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봉조는 가정을 유지하면서도 현미 모르게 두 집 살림을 했다.
1972년 오일쇼크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어느 날이었다. 손에 큰 가방 하나 든 현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동부이촌동 삼익APT)에 찾아왔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작은 아이는 4학년이지 않았나 싶다. 현미가 우리집에 온 사연은 이러했다. 이봉조는 현미를 입적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그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리고 본처와 헤어지겠다는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린 현미에게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이봉조의 본처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접한 현미는 그 길로 두 아이를 데리고 창경궁 부근의 원남동 집을 나섰다.
살 곳도 없으니 큰 일이었다. 현미의 아들 영근이가 우량아여서 우리는 현미를 '돼지 엄마'라고 불렀다. 우린 그 정도로 친했다. 엄앵란은 이봉조에게 버림받고 빈털터리가 된 현미가 가련해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침 동부이촌동 삼익(렉스)APT가 분양 중이었다. 우리는 65년부터 주거래은행이던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에서 대출을 받아 현미가 아파트 분양받을 수 있는 돈을 만들어주었다. 그 때만 해도 은행에서 대출 받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순전히 엄앵란의 신용대출이었다. 지금도 현미가 방송에서 엄앵란에게 신세졌다고 하는 건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이봉조가 진주 출신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미와 자식들을 못본 채 하는 그의 처신은 사나이답지 못했다. 진작에 자신의 말대로 본처와 헤어지던가, 현미와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든가를 결정했어야 했다. 아무리 형이라고 불렀지만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어느 모임에서 이봉조와 마주쳤다. 나는 눈을 부릎뜨고 이봉조를 노려봤다.
"형, 애들 팽개치고 왜 그렇게 책임을 못져? 동생한테 맞아봐야 정신차리겠어!"
그가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봉조는 그 사건 후 나만 보면 피해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인 87년 8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 역시 현미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남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지금도 가방 하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으니….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