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잘하고 한 번 잘못해서 망할 수 있다. 1960년대 최고 흥행 영화 '맨발의 청춘'을 제작한 극동흥업이 그랬다.
극동흥업은 나와 엄앵란 콤비·김기덕 감독 등을 앞세워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했다. 60년대 초·중반 내가 주연한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불량 소녀 장미' '말띠 신부' '흑발의 청춘' '불타는 청춘' 등을 활기차게 쏟아냈다. 극동흥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아카데미극장의 경우 '맨발의 청춘' 하나로 1억원의 빚을 다 갚았다.
67년 무렵 극동흥업은 서울 시내 중심가의 빌딩 하나를 통째로 사고도 남는 자금을 축적했다. 극동흥업엔 어떤 영화든 잘 만들어내는 전천후 감독인 김기덕이 있었다. 차태진 사장과 함께 극동흥업을 창업하다시피 한 김기덕 감독은 찍기만 하면 흥행이 되는 극동흥업의 '달러 박스'였다. 든든한 우군을 가진 차 사장은 중부경찰서 맞은편 희망사라는 잡지사의 빌딩을 사서 사옥을 이전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김 감독에 따르면 그 와중에 홍콩 대규모 서커스단의 전국 투어를 유치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이 전면 수정됐다. 이 서커스단은 코끼리까지 보유하는 등 당시로서는 세계 3대 서커스에 들어갔다. 자금을 더 키우려는 욕심에 꼭 맞아떨어지는 이벤트였다. 피에로가 대포를 발사하면 그 속에 있던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등 60년대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서커스들이 가득했다. 전국 투어의 출발점은 부산이었다. 대구와 각 도시를 거치며 북상해 화려하게 서울로 입성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홍콩 서커스단의 공연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자금 조달이 당시 외환관리법과 마찰을 빚으면서 차질이 발생했다. 계약을 마친 상태에서 홍콩 측과 이면으로 진행해야 하는 사항도 있었다. 극동흥업은 미리 각 지역에서 매점 등을 운영할 업자를 선정하고, 이들로부터 선금을 받았다.
복잡한 사정들로 인해 공연 일정이 지연됐고, 계약 불이행과 관련한 피해 분쟁이 일어났다. 예정된 서커스단의 규모도 축소됐다. 결정타는 코끼리 사망 사건이었다. 부산항에서 하역하던 홍콩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바다에 빠져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서커스는 서울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지방 공연에서 가는 곳곳마다 죽을 쓴 탓에 극동흥업은 자본금을 모두 소진했다.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한국에 온 홍콩 서커스단 단장은 하루 아침에 날거지가 됐다. 본국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의 허름한 여관 방에서 생활하던 그는 PX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혀 구속됐다. 단원과 동물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이 공연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망했다.
차 사장은 부도를 내고 해외로 도피했다. 극동흥업이 손해본 액수를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족히 수백 억은 됐을 것이다. 빚 청산 등 급한 불은 극동흥업의 달러 박스인 김 감독이 껐다. 그 자금은 영화계에서 나왔다. 차 사장이 영화계에서 인심을 잃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는 단면이다.
극동흥업은 다음해 재기를 노렸다. 나를 비롯해 그 동안 극동흥업과 거래를 하던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김 감독이 연출한 일부 재기작에 출연해주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홍콩 서커스 후유증에 시달리던 극동흥업은 이후로도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갔으나 영화법 개정과 함께 문을 닫고 말았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