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명장 윤관은 기마대인 신기군을 양성 여진족을 격퇴했다.
신기군은 별무반의 기마부대를 뜻하는 말로 고구려의 개마대 이후 우리 역사에 나오는 대단위의 기마대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주인이었던 고려는 무를 숭상했다. 그러나 대륙을 휘젓고 다녔던 기마대는 유명무실해 졌다. 한반도의 좁은 땅은 기마대가 마음 놓고 회전을 펼칠만한 넓은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주를 잃은 한민족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마대의 기동력과 파괴력보다는 수성전에 유리한 보병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보병이 주력이 된 후 유목민인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후 고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북만주에 위치해 있던 완옌부가 세력이 커지면서 고려와 국경을 놓고 대립했다. 1104년 완옌부는 고려에 투항하던 여진인들을 추격해 정주의 장성부근까지 진출했다. 고려 숙종은 임간과 윤관을 장군으로 임명, 대응했으나 연패했다.
여진의 주력은 기병이었지만 고려군은 주로 보병이었고 중앙의 상비군이었던 6위가 약화됐기 때문이다.
윤관은 숙종에게 보병이 기마대에 승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고 고려는 새로운 군사조직인 별무반을 편성하게 됐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 도탕·경궁·정노·발화군 등의 특수군으로 구성됐다.
별무반은 위로는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양인 농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동원된 거국적인 조직이다.
윤관은 신기군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고 1107년 12월 신기군이 주축이 된 17만의 대군을 출전시켰다. 윤관은 기습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하고 두만강 유역인 동북 지역에 아홉개 성을 축조했다.
한편 신기군의 구성과 임무 정치적인 의미는 유럽의 기사·봉건제와 닮았다.
신기군은 별무반의 다른 병종에 비해 특이한 구성이다. 유럽의 기사들처럼 자신의 돈으로 말을 사고 무장을 갖춰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 부유한 귀족의 자제나 부유한 상인·양인의 자제가 신기군에 편입됐다.
시대상으로도 고려는 한민족 역사상 유럽의 봉건제도와 많이 닮았다. 고려시대는 귀족들의 대농장이 성행했고 이 농장은 산과 강을 경계로 했다. 또 귀족들은 대단위의 사병 조직이 있었고 발언권도 컸다. 고려 숙종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노림수도 있었다. 귀족들의 힘을 약화 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귀족의 자제와 사병을 신기군에 편입시켜 볼모로 활용할 수 있었고 전투에서 사병이 몰살하면 귀족들의 세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기군과 여진족이 사용했던 말은 현 몽고말의 조상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고려는 여진·거란의 유목민들로부터 말을 구입했다.
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