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12시 : 경기장으로김동혁은 12시쯤 특설링이 설치된 수원 월드컵경기장 광장에 도착했다. 링 주변에는 간이의자 300여개가 전부. 그나마 이날 경기는 지역케이블을 통해 중계됐다. 한 달에 한 두 번 열리는 권투 경기지만 방송으로 중계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대 선수에 대해 분석하고 싶어도 비디오 자료 구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그나마 오늘 상대인 권혁은 신인왕전에 출전해 자료가 있었다. 권혁은 신인왕전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감투상을 거머쥔 고등학생 복서. 하지만 6전 6승을 거둘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다.
김동혁은 "경기를 보니 투지가 있어보였다. 최선을 다해야할 것 같다"고 각오를 다졌다. 제해철 포항체육관장은 "혁이는 잃을 게 없다. 멋진 경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권혁의 표정에서도 자신감이 엿보였다.
오후 2시 : 줄넘기 워밍업2시부터 오프닝 매치가 시작됐다. 세미파이널인 김동혁의 경기는 5번째. 김동혁은 라커룸 대용인 임시 천막에서 밴디지(주먹에 감은 붕대)를 체크받은 뒤 줄넘기로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김동혁은 "(감량한 체중의)80% 정도는 돌아온 것 같다"며 싱긋 웃었다. 섀도우 복싱을 시작하자 김동혁의 눈빛이 달라졌다. 복서답지 않게 선해보이던 인상도 야수처럼 매섭게 변했다.
오후 3시 30분 : 결전의 때가 왔다 김동혁과 권혁의 논타이틀 6라운드 매치. 두 선수는 탐색전 없이 시작부터 강하게 부딪혔다. 김동혁은 권혁의 복부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갔다. 권혁은 때때로 날카로운 반격을 펼쳤지만 유효타는 때리지 못했다.
김동혁은 권혁의 공격을 피하면서 침착하게 오른손 스트레이트에 이은 왼손 훅으로 권혁에게 데미지를 주기 시작했다. 김동혁은 경기 후반 KO 기회도 잡았지만 권혁의 투지 넘치는 파이팅에 부딪혀 결국 다운을 빼앗지는 못했다. 결국 김동혁이 3-0 판정승. 김동혁은 홀가분한 듯 가볍게 웃어보였다. 300여 명의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바로 옆 축구장에서 열린 수원과 대구의 경기를 찾은 1만7000여명의 팬들과 비교하면 작은 숫자지만 김동혁은 관중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후 5시 - 또 새로운 도전을 향해김동혁은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다. 다음달 9일 슈퍼페더급 타이틀전을 가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 체급을 낮추는 바람에 며칠만에 또 감량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놓칠 수 없었다. 2009년 7월 오현승전 이후 1년 반 동안 경기가 잡히지 않았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출신 스포츠스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골퍼 양용은이다. 세계챔피언이 돼 양용은만큼 유명해지고 싶다"는 김동혁의 꿈이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 복서들의 현실
전 세계적으로 복싱은 여전히 인기있는 스포츠다. 지난 4월 ESPN이 발표한 스포츠선수 연봉 및 상금 순위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매니 파퀴아오(33·필리핀)가 이를 증명한다.
7체급을 석권한 파퀴아오는 광고료와 대회 초청료 등을 제외하고 공식 연봉과 대회 상금만으로 집계된 랭킹에서 메이저리그의 알렉스 로드리게스(36·뉴욕 양키스)와 함께 3200만 달러(약 346억원)로 1위에 올랐다. 파퀴아오의 인기는 미국에서 활동중인 동양인 중에서도 단연 최고를 자랑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복싱은 철저한 비인기 종목이다. 한국복싱은 한 때 7명의 세계챔피언을 동시에 보유할 정도로 인기와 실력 모두 최고였다. 그러나 점점 하락세를 그리다 2007년 지인진이 격투기 전향을 위해 세계권투평의회(WBC) 페더급 타이틀을 내려놓은 이후에는 '노챔프' 시대를 맞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힘든 스포츠인 복싱에 뛰어드는 선수들이 줄어든데다 종합격투기가 인기를 끌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최근에는 미용과 다이어트 등 생활체육으로서의 복싱 인기는 조금씩 늘고 있지만 프로복싱을 업으로 하는 선수도 줄고 있다. 대전료가 적기 때문이다. 한국타이틀전에서 챔피언이 받는 대전료가 겨우 200만원 정도. 1년에 두 세 경기를 하는 게 전부이니 당연히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다 보니 대다수의 선수는 운동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투잡'을 할 수 밖에 없다. 제주맥스체육관에서 관원들을 지도하는 김동혁은 처지가 나은 편. 그나마 있는 선수들도 프로보다는 아마추어에 쏠려 있다. 지방자치단체 팀들에 소속된 아마추어 선수들은 병역 특혜 기회는 물론 상무를 통해 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량을 지닌 선수들은 억대가 넘는 연봉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한국권투위원회 13개 체급의(챔피언, 랭킹 1~10위) 143개의 랭킹 중 공석이 36개나 될 정도다. 프로가 아마추어같고, 아마추어가 프로같은 셈이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사진=이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