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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차일혁 경무관 (하)
1998년 구례 화엄사에 차일혁 총경 공적비가 세워졌다. 51년 빨치산 토벌작전 중 남부군 근거지인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무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친은 고민이 빠졌다. '절을 불태우는 건 한 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는 천년 세월도 부족하지 않은가.'
결국 부친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지리산 각황전 문짝만 뜯어내 불태우고는 "전각 문짝을 태우는 것도 절을 태운 것이니 우리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철수명령을 내렸다. 만약 부친이 명령대로 화엄사를 불태웠다면 오늘날 국보가 된 천년사찰 화엄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해 가극 '눈물의 여왕'도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됐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부친 차일혁 총경과 백조가극단 전옥 단장, 여자빨치산인 신정하의 삼각관계를 그린 나의 원작소설 '애정산맥'을 바탕으로 이윤택씨의 연출에 삼성영상사업단이 제작해 무려 20만 명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구례 화엄사 차일혁 총경 공적비 제막, 가극 '눈물의 여왕' 흥행, 경찰청 박물관 중앙에 영정이 모셔지는 등으로 대중적, 문화적으로 아버지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그 무렵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무관 추서에 대한 의견이 나온 모양이었다. 하루는 나의 절친한 지인께서 조심스레 "차일혁 총경의 경무관 추서를 논의 중입니다"라는 말을 전해왔다.
물론 기다렸던 추서였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잔이 넘칩니다. 아버님은 절대 혼자 추서되실 분이 아닙니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항상 조용히 참고 인내하며 아버님을 모셔왔다. 74년 국가치안분야에서 유공자로 아버님이 선발되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차일혁 총경을 위한 비석을 세우라고 하사금까지 전달받았지만 나는 비를 세우지 않았다.
혹자는 불효를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의 심정부터 헤아렸다. 부친은 누구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잘 아는 분이셨다. 부친은 천성적으로 비석이나 훈장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2007년에는 서울경찰청에 세워지기로 한 추모비가 새 청장으로 바뀌자 여론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야무야되었다.
언젠가 서울구례 화엄사에 선친의 공적비가 소홀하게 관리된다는 연락이 왔다. 내려가 보니 화엄사 박물관을 건설한다는 이유로 98년에 세운 공적비는 외진 곳에 옮겨져 낙서가 되어있는 등 홀대를 받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속이 상했겠지만 나는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스님에게 조용히 여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님도 당황하셨던지 "이 비석은 우리 관할이 아닙니다"라고 둘러대기 바쁘셨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 부친은 이런 비석이 또 세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을 테니 말이다. 복은 도둑질할 수 없다고 그 날의 인내가 있었기에 경무관 추서 뿐 아니라 2008년도에는 경찰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훈장까지 받으셨다. 화엄사 문화재를 지킨 공로를 60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정받게 되신 셈이었다. 2009년엔 아산경찰교육원에 2000석 규모의 차일혁 홀이 개관되었다. 또한 얼마 전 23일에는 국영방송국 '역사스페셜'이란 프로그램에서 '포화 속에서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에 소개되기도 했다. 선친과 일제 악질 고등 형사 사이가 히치로, 선친과 조선의용대와의 관계도 조망되리란 예감이다.
이제 부친은 차일혁 경무관이 되셨다. 74년도엔 비석도 세우지 않았고 98년도엔 단독 경무관 추서도 정중히 거절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709명의 거룩한 순직 경찰 영령들과 함께 특진하셨기 때문이다. 6월6일 현충일 부친의 사진이 나오는 롤콜(Roll call)을 바라보며 이 땅의 모든 경찰 영령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