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애플의 최고경영자로서 더 이상 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고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날이 오면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알리겠다고 항상 말해왔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로 그날이 왔습니다."
지난 주 스티브 잡스의 퇴임사를 보며 슬픈 감정이 들었다. 문득 옛날 생각도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다. 당시 하교할 때면 절친했던 친구 집으로 매일 달려가 함께 애플2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컴퓨터 있는 집'이 반에서 '최고 부자 집'으로 통했을 때다. 기자 역시 가장 갖고 싶었던 선물이 애플2 컴퓨터였다. 하지만 너무 비쌌다.
그후 언젠가부터 관심이 떨어진 사이에 애플은 어느덧 낙후된 이미지의 고물 컴퓨터가 됐다. 그리고 IBM이 컴퓨터 시장을 장악했다.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이 '애플'보다 훨씬 세련된 느낌을 줬다. 그런데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잡스는 기업가 사상 'Greatest second coming'으로 불리는 컴백을 일궈내며 애플을 시가총액 세계 1위(현재 엑슨 모빌이 다시 1위) 기업으로 만들었다.
'혁신적인' 기업으로 출발해 80년대 말들어 '후졌다'는 느낌을 줬던 애플.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IT 기업으로 드라마틱하게 부활한 스토리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기자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에게 해고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던 그의 화려한 복수극에도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사실상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부터 3D 애니메이션-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등으로 세계의 패러다임을 다섯 차례 바꾼 잡스. 그런데 그가 알게 모르게 또 하나의 세계를 바꿔놓았다. 바로 스포츠다.
기자가 한동안 잊혀졌던 애플의 위력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스테이플스센터서 레이커스 취재를 했을 때였다. 라커룸에 있던 선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이팟을 들으며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아이팟 열풍이 거세지자 NBA 사무국은 '아이팟 금지령'을 내렸다. 2004년 음악광으로 알려진 빈스 카터가 첫 번째 케이스로 걸렸다.
그는 "난 음악을 들어야 경기에 집중이 잘된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무국은 헤드폰을 낀 상태서 운동하는 것은 NBA 복장 규율에 어긋난다며 카터에게 경기 시작 20분 전부터는 아이팟을 구장에 아예 들고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폰은 스포츠 세계의 소통을 바꿨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3일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 많은 스마트폰 1위는 아이폰4. 2위는 아이폰 3GS라고 한다. 스포츠 스타들의 '아이폰 사랑'도 대단하다. 필 잭슨 전 레이커스 감독은 T-모빌 마이터치 광고모델이었음에도 아이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발각(?)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선수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바로 바로 알리게 된 것도 아이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장 큰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이패드다. 특히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됐다. 블룸버그 스포츠의 '피치 리뷰(pitch review)' 앱 때문이다. 일반 팬은 살 수 없는 오로지 현역 메이저리거들만 살 수 있다.
종전까지 선수들은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비디오 분석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타격이나 투구를 분석할 수 있었다. 구장 밖에서는 비디오 분석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올 시즌부터 '피치 리뷰'가 등장하며 모든 게 달라졌다.
그렇다면 피치 리뷰에는 뭐가 있길래 선수들이 난리일까. 예를 들어 추신수가 양키스 선발 CC 사바시아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고 치자. 그러면 사바시아 사진만 누르면 추신수가 웨이크필드를 상대로한 통산 타석 성적과 비디오가 함께 뜬다.
추신수가 사바시아가 어떤 투구를 던졌을 때 잘 쳤는지 타격 모션을 상세하게 잡아준다. 주자가 1명일 때 사바시아의 투구 패턴 무사~2사 주자 만루 상황서 투구 패턴까지도 다 나온다. 또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가 나올 때 사바시아가 어떤 투구를 던지는 지까지도 비교분석해 준다.
현재 양키스의 닉 스위셔 카디널스의 앨버트 푸홀스 등이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수들은 계속 블룸버그 측에 피드백을 줘 정보가 계속 업데이트된다. 이쯤되니 아이패드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새 필수품이 됐다.
뿐만 아니다. 프로 스포츠 최고의 이벤트인 수퍼보울 광고 세계를 뒤집어 놓은 것도 애플이었다. 1984년 명 감독 리들리 스캇의 애플 맥 광고는 영화를 방불케하는 스케일을 선보여 지금도 광고업계에서 자주 회자된다.
이젠 수퍼보울이 경기보다는 광고가 더 주목을 받는 이벤트로 변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모두 애플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이렇듯 세상을 들었다 놓았단 한 잡스가 받은 연봉은 달랑 1달러였다고 한다. 복귀 뒤 CEO서 사임할 때까지 그가 받은 돈은 14년 동안 14달러. 돈이 아닌 열정으로 움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참고로 스포츠 인물 가운데 잡스처럼 무료로 일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이클 조던. 지난 2001년 워싱턴 위저즈에서 현역 복귀한 뒤 2년 동안 뛴 그는 연봉 전액을 9.11 테러 희생 가족을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로스앤젤레스=원용석 중앙일보USA 기자 [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