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아네모네 마담'(1968년). 결혼 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복귀한 엄앵란(맨 오른쪽)은 촬영 당시 임신으로 몸이 불어난 상태였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아네모네 마담'(1968년). 결혼 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복귀한 엄앵란(맨 오른쪽)은 촬영 당시 임신으로 몸이 불어난 상태였다.
엄앵란이 영화배우로서 가장 어렵게 찍은 영화는 1967년작 '아네모네 마담'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결혼 후 내 아내 엄앵란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64년 11월 결혼 후 엄앵란은 주부로서 이태원 181번의 살림을 꾸려가는데 전념했다. 65년 첫딸 경아가 태어났고, 67년 초 둘째 아들 석현이가 임신됐다. 출산 후 몸도 불어서 영화 출연에 적합하지 않았다. 65년에 상영된 엄앵란 주연의 작품들은 모두 결혼 전의 촬영 분량이다. 인심이 푸짐해 방문객에게 만난 것을 잘 대접한 그녀는 이태원 181번을 '영화계의 사랑방'으로 만들어나가는데 만족했다.
67년 가을 접어드는 무렵 어느 날, 엄앵란은 평소처럼 수건을 쓴 채 김장용 고추의 꼭지를 따고 있었다.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그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의 출세작인 '아낌없이 주련다'를 비롯해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영화 히트작을 제작한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이었다. 극동흥업은 신성일·엄앵란표 청춘영화의 산실이었고, 차 사장은 우리 부부를 굉장히 귀여워해주었다. 엄앵란과 극동흥업의 전속인 김기덕 감독을 결혼시키려 하기도 하고, 나와 엄앵란이 결혼할 때 함께 작전을 짠 사람도 그였다. 나와 엄앵란에겐 가족과 같은 분이었다.
엄앵란으로부터 들은 그 날의 상황을 옮겨본다. 차 사장은 고추 꼭지를 따고 있는 엄앵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앵란아, 나 좀 살려줘라. 네가 집으로 들어가고 난 후, 난 망해버렸다. 우리 영화에 출연해줘."
엄앵란은 깜짝 놀랐다. 임신 5개월로 배가 제법 나온데다, 스크린을 떠난 지 3년이나 된 주부에게 주연 제안이라니. 그녀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차 사장님, 저 74㎏이에요. 제가 상품 가치가 있겠어요?"
극동흥업은 엄앵란이 스크린을 떠난 후 다소 고전했다. 엄앵란의 말을 들은 차 사장은 햇빛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고추 사이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간곡하게 매달리는 통에 엄앵란은 결국 그 자리에서 출연을 약속하고 말았다. 상대가 차 사장이었던 만큼,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차 사장의 열정적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 작품이 바로 나와 엄앵란 주연의 '아네모네 마담'이다. '아네모네'란 다방의 마담과 젊은 청년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엄앵란이 결혼 후 촬영한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엄앵란이 60년대 트로이카(문희·남정임·윤정희)와 함께 한 70년작 '결혼교실'의 경우 라스트 신에서 무스탕 타고 나타나는 특별출연에 불과했다.
엄앵란의 스크린 복귀작인 '아네모네 마담'은 그녀에 대한 극동흥업의 애정 표시라 할 수 있다. 당시 여배우의 결혼은 은퇴를 뜻했다. 엄앵란이란 배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향수라 할까. 참 고마운 회사였다.
내가 남자주인공을 맡기는 거북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속으로 다른 배우가 엄앵란을 상대해주기를 바랐다. 뱃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선지 촬영 중 연애 감정이 살아나지 않았다. 엄앵란 역시 나와의 해변가의 러브신이 실감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네모네 마담'은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차 사장은 결산 후 엄앵란에게 코로나 자동차 한 대를 보내주었다. 개런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엄앵란은 차 사장의 선물에 놀랐다. 훈훈한 마음 씀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