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NFL 인종차별 허문 데이비드 레이더스 구단주 별세
지난 8일 오클랜드에서 82세 일기로 사망한 오클랜드 레이더스의 앨 데이비스 구단주는 NFL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는 구단주에 앞서 스카우트, 보조코치, 감독, 단장, 커미셔너로도 활동했는데, NFL에서 이처럼 방대한 역할을 소화한 인물은 그가 유일했다.
데이비스는 1929년 7월 4일 매사추세츠주 브락튼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로즈 커셴범 데이비스와 루이스 데이비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다지 운동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스포츠 팀 구단주가 되는 게 그의 꿈이었다. 시라큐스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문학과 재즈에 조예가 깊었고, 군사 역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 전쟁과 가장 흡사한 스포츠인 풋볼에 푹 빠졌다.
그는 1950년 롱 아일랜드의 아델피 칼리지에서 라인코치로 임명되며 풋볼에 본격 입문했다. 2년 뒤 징병된 그는 군사학교에서 풋볼팀 감독을 맡았고, 1954년에 전역한 뒤 볼티모어 콜츠(현 인디애나폴리스)로부터 스카우트직을 제의받아 프로풋볼에 들어섰다. 그 뒤 1957년 바닥권을 맴돌던 USC의 공격코치직을 받아들였고, USC의 공격 작전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팀을 부활시켰다.
이후 AFL 소속 LA 차저스의 공격코치로 활약, 차저스가 정상급팀으로 거듭나는데 기여한 뒤 1963년에 역대 최연소(33세)로 오클랜드의 감독겸 단장직을 맡았다. 그는 다른 팀들이 노쇠했다고 버린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재미를 봤다. 레이더스의 상징이 된 은색/검정색 유니폼과 해적 로고도 그가 짜낸 아이디어였다. 종전 42경기서 33패를 기록했던 오클랜드는 그의 지휘 아래 첫해에 10승4패를 기록하며 궐기했다. 그 해 데이비스는 AFL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3년 뒤, AFL 커미셔너가 되며 프로풋볼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선수 영입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데이비스는 라이벌 리그인 NFL의 스타 쿼터백들을 대거 뺏어오며 AFL-NFL 합병을 성사시켰다. NFL이 미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그는 1만8500달러를 지불하며 레이더스 지분의 10%를 사들여 구단 경영권에 뛰어들었다. 1972년에는 팀의 대주주가 돼 전권을 행사하게 됐다. 오클랜드는 그의 통치하에 1976, 1983시즌에 수퍼보울 우승을 거두면서 최고 인기팀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클랜드-알라미다 카운티 콜로시엄이 구장 재건축에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데이비스는 1982년에 팀을 LA로 이전시키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레이더스는 1983시즌에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꺾고 프랜차이즈 세 번째 빈스 롬 바르디 트로피를 거머쥐는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선수들의 인체성장 호르몬과 약물 복용, 알코올 중독 문제가 불거져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 데이비스는 홈 구장인 LA 콜로시엄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며 LA시와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콜로시엄이 1932년과 1984년에 올림픽을 개최하는 등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구장이지만 럭셔리 박스가 없고, 매주 9만2000석을 매진시키기 힘들다며 새 구장을 찾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데이비스는 레이더스 홈 구장을 할리우드 파크로 옮기는 방향도 모색했으나 LA시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지 못하자 팀을 다시 오클랜드로 복귀시켰다.
▶그루덴 감독을 잡았더라면…
고향인 오클랜드로 돌아왔지만 이후 레이더스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지금까지 5할 승률 이상을 올린 게 불과 세 번. 존 그루덴 감독을 내보낸 것은 그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꼽힌다. 그루덴이 이끌던 레이더스는 2000년에 AFC 챔피언십에, 2001년에 2년 연속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그루덴의 공격이 화끈하지 않다면서 그를 쫓아냈다. 또 그루덴에게 높은 연봉을 주기도 싫었다. 그는 팀의 새로운 ‘호프(hope)’로 여겨졌던 그루덴을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에 내보내며 2002ㆍ2003 1라운드, 2002ㆍ2004 2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을 가져왔다.
빌 칼라한 사령탑으로 갈아탄 레이더스는 2002시즌에 수퍼보울에 진출했으나 당대 최고의 수비수들이었던 워렌 샙, 티키 바버, 존 린치 등이 버틴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를 상대로 졸전 끝에 21-48로 참패했다. 쫓아낸 그루덴에게 막혀 우승을 놓친 셈이었다. 데이비스는 사망하기 전까지 그루덴의 우승에 대해 “NFL의 음모”라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레이더스는 겉잡을 수 없는 몰락을 거듭, 9년 동안 6명의 감독이 왔다 갔다. 2003~2009시즌까지 NFL 최초로 7년 연속 11패 이상의 불명예도 안았다.
▶인종차별을 가장 싫어해
유태인인 데이비스는 풋볼내 팽배해 있던 인종차별 문화를 혐오했다. 1963년에는 앨라배마주에 인종차별법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시범경기를 급작스럽게 취소시켰고, 65년에는 같은 이유로 뉴올리언스에 열리기로 돼있던 AFL 올스타 경기 불참을 선언했다. 당시 올스타전은 결국 휴스턴으로 옮겨 치러졌다.
NFL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아트 셸)과 최초의 라틴 감독(탐 플로레스)을 영입한 것도 그였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여성 프런트 멤버(에이미 트래스크)를 두기도 했다. 밖에서는 냉혈한으로 알려졌지만 레이더스 은퇴 선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한 번 레이더는 영원한 레이더다”라면서 아낌없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스앤젤레스=원용석 중앙일보USA 기자 [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