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초보자에게 말은 ‘의리의 동물’또는 ‘배신의 동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은 자신의 경험에 국한해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전자의 경우 대표적인 사례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가 그린 ‘성 바울의 회심(1601. 캔버스에 유채)’이란 작품을 들 수 있다.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소장돼 있는 이 작품은 시력을 잃고 말밑에 누어 하늘을 향해 두손을 번쩍 든 바울에게 구원의 빛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의미를 배제하고 그림 자체만 놓고 보면 낙마자 바울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말을 절묘하게 대비시켜놓은 걸작이다. 항거불능의 바울, 그것도 시력을 상실한 채 의지할 것 없는 바울에게 육중한 말은 바울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철저한 보호자로 남아 있는 말은 적어도 그에게는 ‘의리의 동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외승을 하다보면 작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목격하곤 한다.
고삐까지 놓쳐버린 상태에서 낙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이 곁을 떠나지 않고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일어나기를 기다려주는 경우 낙마자는 그 말에 대한 의리와 배려에 깊이 감동한다. 그런가하면 낙마시 고삐를 붙잡고 있어도 끝내 어디론가 줄행랑치는 말들도 있다. 그 대표적 사례는 영화 ‘슈퍼맨’ 주연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1952∼2004)의 낙마사고를 들 수 있다.
승마를 좋아했던 리브는 1995년 장애물 비월을 즐기다가 등자가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전신마비 환자가 되고 말았다. 야속하게도 말은 등자가 끼워진 상태에서 낙마한 리브를 질질 끌고 달렸다.
어느 쪽이 옳을까? 말은 의리가 있는 동물도, 배신을 하는 동물도 아니다. 의리와 배신은 인간의 편에서 지극히 제한된 상식적 수준의 이론과 경험에 의해 굳어진 인식이다.
말의 뇌리속에는 의리나 배신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지 않다. 낙마시 기승자 곁을 떠나지 않는 말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승자가 자신에게 가해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판단은 과거 경험에 의존한다. 만약 과거 낙마했던 기승자가 그 책임을 말에게 전가하면서 말을 호되게 꾸짖거나 채찍을 가했다면 말은 낙마시 기승자를 가해자로 인식한다. 또 주위환경이 자신의 안전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판단도 말이 낙마자 곁을 떠나지 않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말의 습성도 물론 중요하다. 울타리에서 늘 도주를 꿈꿔왔다면 낙마시 말에게는 탈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이렇듯 편향된 혹은 편협한 시각은 말을 혹사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