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는 중국 대륙을 점령한 마지막 기마민족인 만주족의 힘이자 자존심이었다. 팔기(정황기·정백기·정홍기·정람기·양황기·양백기·양홍기·양람기)의 위력은 당대 아시아 최강이었고 청이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에서도 우위를 점 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팔기는 만주족이 17세기 초부터 설치한 씨족제에 입각한 군사 ·행정제도로 여덟 종류의 기에 의하여 편성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 제도하에 있던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고 했다. 이들은 각 개인의 전투력과 무장이 뛰어났다. 특히 팔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대는 화살은 물론 화승총의 탄환도 튕겨내는 견고한 갑옷으로 중무장했다.
역사로 전해지는 이들의 전투력은 믿을수 없을 정도다. 전성기 팔기 기마병 1명은 1000명의 한족 병사를 거뜬히 격파했다고 전해진다. 조선과 청의 싸움이었던 병자호란 '쌍령전투'에서는 팔기기마대 300명에 4만명의 조선군이 전멸했다. 또 '살이호전투'에서 팔기는 명나라 중장기병 10만명을 몰살시켰다.
편제는 300명 단위로 하나의 우록(牛錄)이 구성되고 5개의 우록으로 하나의 갑라(甲喇)가 편성된다. 5개의 갑라는 다시 하나의 고산 (固山)을 구성했다. 고산의 우두머리가 한개 기의 대장이었던 기왕이었다. 팔기는 각 기에 7500명의 군사가 편제되어 있었고 만주족이 거느린 팔기의 총 수는 대략 6만명 정도였다.
청왕조에서 팔기는 중용됐다. 만주인은 16세부터 팔기에 편입시켜 해마다 은 24냥을 급료로 지급했고 급수에 따라 급료를 올려주었다. 이들이 결혼을 하면 빈부에 상관 없이 반드시 은 20냥을 주어 보조했다. 이들은 자존심도 강했는데 상업이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됐다. 또 법률을 어긴 기병은 민간인 행정관이 아닌 만주족 장군에게 재판을 받았다.
청나라 초기 팔기는 정치적으로도 힘을 발휘했다.
초창기에는 팔기를 담당하는 기왕(여덟명)의 합의 하에 황제가 선출됐다. 이것은 팔기제도를 확립한 태조 누르하치에 의한 것으로 팔왕의 대부분이 누르하치의 아들이었다. 2대 황제인 홍타이치는 팔왕들의 합의에 의해 누르하치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초창기 그의 지위는 팔왕 중에 한명일 뿐이었다. 당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4대 기왕은 다이산·아민·망굴타이·홍타이치(모두 누르하치의 왕자)였고 서열상 홍타이치가 전권을 휘두를 수 없었다.
이처럼 팔기는 모두가 황제의 명령만을 받는 것이 아니었기에 태조와 태종의 시대에는 정황기와 양황기,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 정백기를 더한 3기(상삼기)만이 황제 직할이었고 나머지(하5기)는 각 기왕들이 장악하는 형태였다. 상3기는 일종의 황제친위군의 성격이라 별도의 기왕을 두지 않았고 황실의 시위군이나 자금성의 수비군을 뽑을때 이 상3기에서 선발했다. 관리 임용배출 선발권그리고 대외무역 권까지 가졌다. 하5기는 전통에 따라 만주족이 기왕이 됐다.
한편 팔기는 19세기들어 유명무실해졌다. 평화가 지속된 150년 동안 기병의 전투력은 쇠퇴했고 태평천국의난 이후로 해체됐다. 이들이 사용한 말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기마민족이 사용했던 북방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