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부상을 극복하고 재기해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은빛가속도' 백광(국산 8세 수말)이 4일 팬들이 마련해 준 비공식 은퇴식을 갖고 정든 경주로를 떠났다. 백광은 질병 등 수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며 오뚝이처럼 재기해 마주와 조교사는 물론 수많은 경마팬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준 경주마다. 이 때문에 백광의 은퇴는 그동안 경주로를 떠난 그 어떤 경주마보다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고질병인 인대염이 끝까지 백광의 발목을 잡았다. 백광은 경주마로선 환갑으로 불리는 8세의 나이에도 지난 10월 초 열린 KRA컵 클래식 대상경주에 출전, 노익장을 과시하며 경주로를 달렸다. 하지만 경주 후 마체검사에서 '우중수부계인대염'으로 인해 경주부적격 판정을 받고 은퇴를 결정했다.
백광의 이수홍(82) 마주는 "제 몸 부서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뛰어준 백광에 고마움을 느낀다"며 "향후 씨수말로 활동하며 제주도의 목장에서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다. 백광을 빼닮은 후손들이 다시 경주로를 달리게 되기를 원하다"고 말했다.
지난 2005년 경주로에 데뷔해 통산 25전 11승(승률 44%)의 성적을 거둔 백광은 세계적인 명마 '미스터프로스펙터'를 고조부로 둔 명문 혈통의 경주마다. 혈통만큼이나 성적도 뛰어나 데뷔한지 불과 3전만에 대상경주(헤럴드경제배)에 도전, 준우승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2006년에는 대상경주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며 이수홍 마주에게 커다란 영광을 안겨주었다. 특히 제 이름처럼 빛의 속도로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폭발적인 추입력을 발휘하며 역전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 '은빛가속도'란 별명도 얻었고 수많은 열혈팬도 거느렸다.
하지만 백광에게 병마가 찾아 든 것은 2007년.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좌중수부계인대염'이란 난치병에 걸려 더 이상 경주마로 뛸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경주마로서 인대염은 완치가 어려운 난치병이다. 경주마는 한 번 쓰러지면 다시 경주로에 서기 힘들다. 마방 비용만 한 달 평균 80만~100만원 가량이 드는데다 재기 가능성도 희박해 마주들 대부분이 안락사를 택한다. 그러나 이 마주는 "가족같은 놈을 어찌 포기하느냐"며 실낱 같은 희망을 간직한 채 재활을 선택했다.
이 마주는 자식처럼 아끼던 백광을 위해 백방으로 치료책을 찾던 중 국내에서는 아직 선례가 없는 줄기세포 치료에 희망을 걸게 된다. 반신반의했던 줄기세포 치료와 재활치료의 시간이 이 마주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치료 후에도 회복이 더디자 이 마주는 지난해 11월 담당 조교사와 상의한 끝에 백광을 제주도 해변가에 있는 목장에 풀어놓기로 했다. 그는 '병원치료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줬는데도 쉽게 낫질 않아 마지막 수단으로 '자연으로 돌려보내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연치유 5개월 만에 백광이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이 마주는 "기적이 따로 없었다. 마구간도 없고, 나무도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서 비와 바람을 다 맞아가며 홀로 병마와 싸운 놈의 근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눈물이 솟구쳤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병마를 이겨낸 백광은 2007년 4월 이후 장장 30개월 만에 2000m 장거리 경주에서 내로라하는 1군마들을 따돌리고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국내 최고 경주마를 가리는 대통령배(G1) 대상경주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이 마주의 극진한 사랑에 보답했다. 이 마주와 부인 황영금(80)씨는 그해 백광이 받은 상금 8000만원 중 절반을 장애인들을 위해 써달라며 백광의 이름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
1992년 개인마주제도가 도입됐을 때부터 평균 8~10마리의 말을 보유해온 이 마주는 "내게 경주마는 오락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가족"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백광과 인연을 맺은 것은 백광의 누나 '소백수'를 통해서다. 2002년 말을 사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이 마주에게 워낙 체구가 작아 외면당하던 소백수가 눈에 들었고, 이 인연으로 한살 터울인 백광과 여동생 '백파'까지 소중한 가족이 됐다.
백광은 한국마사회의 경주마 은퇴 조건을 갖추지 못해 공식 은퇴식도 없이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백광의 팬들이 힘을 모아 4일 경주로 앞 시상대에서 감동적인 은퇴식을 가졌다. 이별의 자리가 아니라 백광의 새 출발을 축복하는 자리로 만들겠다는 게 팬들의 공감대였다.
백광의 팬들은 그동안 최고의 경주마로 감동을 안겨주었던 백광에게 공로패를, 이수홍 마주에게는 감사패를 각각 전달했다. 또 국내 최초로 동물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전달받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도 감사장을 통해 백광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