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작을 고를 때 보통 소속사 식구들과 상의하는데, '원더풀 라디오'는 처음으로 내가 먼저 강력하게 하겠다고 한 작품이다. 더 이상 나이 들면 아이돌 분장 못할 것 같았거든.(웃음) 부담은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었다. 권칠인 감독님은 현장에서 배우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신다. 덕분에 편하게 연기했다. 또 내가 워낙 음악을 좋아한다. 진아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가수니까 영화 내내 음악이 깔릴 텐데, 그럼 설사 영화가 재미없어도 음악이 관객 마음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 샤방샤방 로맨틱한 곡만 들을 것 같기도 한데.
잡식이다. 내 아이팟 리스트를 본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메탈리카도 듣고 쇼팽도 듣는다. 클럽 음악이 나오다가 재즈가 나오고, 소녀시대 노래가 나오다가 록 음악이 나오고, 명상 음악이 나오다가 자메이카 음악이 나오는 식이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셔서 어릴 때부터 음악을 많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는 어머니를 졸라서 故 김현식 6집 앨범 테이프를 사서 매일 밤 ‘내 사랑 내 곁에’를 들으면서 울었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용돈을 아껴서 CD를 모으기 시작했다. 제목을 모르는 팝송이 있으면 음반 가게 아저씨에게 “아저씨, (허밍하면서) 바바바~ 이거 있어요?” 하면서 물어서 샀다.(웃음)
-전작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이하 '시라노')으로 만났을 때는 희중이 자신과 70퍼센트 비슷한 인물이라고 했다. '원더풀 라디오'의 진아는 얼마나 닮은 것 같나?
한 50퍼센트?
-진짜? 희중은 차분한 인물이고 진아는 생기발랄한 인물이라 진아랑 더 닮았다고 할 줄 알았다. 밝은 성격 아닌가?
나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내가 진아처럼 밝고 명랑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많이 아는 사람들은 희중과 더 닮았다고 얘기한다. 생각이 좀 많다고 해야 하나?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걸 얘기할 때는 시원시원한 편인데, 가족, 친구, 연인을 대할 때는 생각이 많아진다. 얼마 전에도 친구한테 섭섭한 게 있어서 1년을 참다가 얘기했는데, 얘기를 꺼내자마자 친구가 울더라. 1년 동안 내가 속마음 털어놓기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시라노' 마지막에 상용(최다니엘)이 바닷가에서 사랑 고백하는 장면에서 희중이 뜬금없이 “바다 색깔이 원래 저랬구나” 그러잖나. 예전에 병훈(엄태웅)과 사귈 때 병훈이 같이 바다에 가자고 했던 얘기에 그제야 대답하듯이. 그 느낌이 와 닿아서 '시라노'에 출연한 거다.
-'원더풀 라디오'의 진아는 왕년에 잘나가던 아이돌 출신 가수다. 같은 연예인으로서 진아가 방송가에서 겪는 아픔을 쉽게 이해할 수 있던가?
영화에서 내가 제일 아끼는 장면이 진아가 재혁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믿지 않아도 너만은 날 믿을 줄 알았다”고 하는 부분이었는데,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져서 결국 잘렸다. 대중이 나를 오해할 때도 힘들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날 믿어주지 않을 때 더 큰 상처를 받는 것 같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 이민정을 믿어줄 거란 믿음이 있나?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한 사람과 오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그건 서로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연기한 게 아니라서 연예계 친구들보다 어릴 적 친구들이 훨씬 많다. 모두 초·중·고등학교 친구들이라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은 사이다. 그 친구들이 나를 연예계에 갇히지 않게 해준다. 친구들이 집 앞 포장마차에 있다고 부르면 난 그냥 모자 하나 쓰고 간다. 그게 오히려 청담동 술집에 가는 것보다 주목을 덜 받는다. 다들 취해서 술 마시고 있기 때문에 등만 보이면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웃음)
-'그대, 웃어요'(SBS, 2009)와 '시라노'로 이른바 ‘뜨지’ 않았나. 이름 앞에 ‘여신’이란 별명도 꼬박꼬박 붙는다. 그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게 있나?
친구들에게 더 비싼 밥을 사줄 수 있게 됐다는 거 말고 사람 이민정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일하는 이민정은 처음보다 좀 더 융통성이 생겨서 일하기 조금 편해진 것 같다. 신인 때는 잔뜩 긴장해서 내가 가진 걸 다 못 보여주고, 그래서 집에 가서도 잠도 못 자면서 힘들어 했거든. 배우는 늘 남의 평가를 받는 직업이라 잘못하면 불안에 빠지기 쉬운데 처음 연기할 때 아빠가 해주신 말씀이 큰 힘이 된다. 내가 처음 연극한다고 했을 때는 별 말씀 안 하셨는데, 영화랑 드라마에 나간다고 하니까 “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고 덤비는 거냐? 죽을 때까지 사람들 눈치 보면서 살 수 있겠어? 그 일을 계속 할 거면 절대 불안해 하지 말고 내일이라도 관둘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빠 말씀이 정답인 것 같다. 언제라도 관둘 수 있다는 마음을 먹어야 괜한 일에 상처받지 않고 모든 일에 올인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