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동생 J가 엄청 화난 목소리로 전화해 대뜸 물었다. “언니 내 얼굴이 색기있게 생겼어?” J는 얼마 전 소개팅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서로가 호감을 가지고 몇 번을 만났는데, 그날 술에 취한 남자가 J에게 말했단다. 본인이 색기있게 생긴 거 알고 있냐고….
“섹시하단 의민데 남자가 단어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닐까?” 나름 중재에 나서봤지만 소용없었다. “듣자마자 화내고 나와 버렸어. 실수라 해도 여자한테 색기있단 말을 함부로 하는 남자는 싫어.”
전화를 끊고 생각해 봤다. 누군가 내게 ‘색기 있게 생겼어요’라고 한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나는 왠지 싫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소릴 평생 못 듣고 사는 게 한이기 때문이다.
색기(色氣)는 달리 ‘욕정의 기운’이라고 하면 될까? 보통 색기는 흐른다, 넘친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흐르고 넘친다는 건 내가 통제하고 수습할 수 없는 상태다.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저절로 흐르고 저절로 넘치니 운명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다. 그래서 섹시하단 의미와도 또 다르다. 섹시함은 야하게 차려 입고 야한 포즈를 잡는 것으로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색기는 제조가 불가능한, 타고난 마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긴 하지만 J는 색기보단 섹시한 쪽에 가까웠다. 타고난 색기를 말한다면 20대에 알고 지낸 K가 갑이었다. K를 처음 봤을 때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흔히 말하는 색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좀더 일찍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도 아니었고 뇌쇄적인 몸매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이 가늘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양이 조선시대 기생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눈빛은 침착하면서도 사연을 담은 듯 느껴졌고 얇은 입술은 주름하나 없이 팽팽하고 늘 반들거렸다. 그 모임엔 더 예쁜 여자도 있었지만 술자리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늘 K였다. 술에 취할수록 그들은 더 K 곁에 앉으려고 속 보이는 수작을 떨어댔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런 외모 때문에 많이 힘들었단다. 오며가며 만나는 남자들마다 집적대는 것도 귀찮았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야근이 잦은 그녀를 같은 빌라 이웃들이 술집에 다닌다고 오해한 적도 있었단다. 야하게 안 입어도, 트레이닝복 차림이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참 저주스럽다고 한탄했다.
물론 남자도 색기있는 남자가 있다. 이들은 짐승남과는 또 다르다. 개인적으로 입술이 두껍고 어깨가 넓은 남자가 섹시하게 보인다면, 입술이 얇고 턱선이 날렵한 남자에게선 색기를 느낀다. 하지만 색기있는 남자는 여자처럼 오해와 편견, 집적댐에 시달리진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색기도 매력이고 재능인데 색기있는 여자에겐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야 마는, 남의 매력을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답답할 뿐이다. 욕정이 마음에선 넘치는데 얼굴에서 표현이 안 돼 섭섭한,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박소현은
남녀의 불꽃 튀는 사생활에 비전문적 조언을 서슴지 않는 36세의 칼럼니스트, 저서로 '쉿! she it' '남자가 도망쳤다'가 있다. [marune@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