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구장에 '이승엽'을 연호하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1일 열릴 예정이던 삼성-두산전이 우천으로 취소됐다. 삼성 배영섭(26)과 김상수(22)가 젖은 그라운드와 방수포 위로 슬라이딩을 하며 팬들의 마음을 달랬다. 한참 동안 즐거워하던 팬들은 이승엽(36·삼성)의 우천 세레머니를 청했다. 팀 후배들과 코치들까지 나서 이승엽을 그라운드로 끌어냈다. 손을 내젓던 이승엽은 결국 그라운드 위로 나왔다.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그는 '희생플라이 상황'을 연기하며 홈 플레이트 앞에서 시원하게 몸을 내던졌다. 팬들은 우천 연기의 아쉬움을 잠시나마 잊었다.
이승엽은 이렇게 그라운드 안팎에서 '스타'다운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승엽의 올 시즌 타율은 0.406(1일 현재)이다. 홈런도 5개나 쳐냈다. 8년 만에 국내 무대로 돌아온 '36살의 이승엽'을 향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낼 만한 성적이다. 그러나 류중일(49) 삼성 감독은 "승엽이에게 물어보라. 아마 만족 못한다고 할 걸"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승엽은 "4할대 타율을 치고 있는 건, 열 번 중 네 번 운이 좋아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 좋았던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이승엽은 4월29일 문학 SK전을 돌이키며 "(김)상수가 나를 살렸다. 1사 3루에서 점수를 내지 못하는 3번타자. 팀에 정말 미안할 뻔했다"고 말했다. 이날 2-2로 맞선 5회초 1사 3루에서 이승엽은 전진수비를 펼치던 SK 2루수 정근우 앞으로 공을 보냈다. 김상수는 런다운에 걸렸지만 상대 수비의 실책을 틈타 홈을 밟았다. 이승엽은 "땅볼, 외야 플라이, 안타에 관계 없이 3루주자가 편안하게 홈을 밟을 수 있는 타구를 쳤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떠올렸다.
안타를 만든 장면도 '운'으로 돌렸다. 이날 경기에서 이승엽은 6회 2사 1·2루에서 중견수·우익수·유격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를 쳤다. 공이 높이 떴고, 깊은 수비를 하던 외야수들이 도달하기 전에 공이 그라운드에 닿았다. 이 사이 주자 2명이 모두 홈을 밟았다. 이승엽은 "가끔 그런 타구가 나와서 타율이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득점권 타율 0.500을 기록하고 있다. 득점 기회에서 두 번 중 한 번은 내야 땅볼이나 외야 플라이가 아닌 안타 혹은 홈런으로 타점을 올렸다. 이승엽이 시즌 초반부터 장타를 쳐내고 있기에 상대 야수들은 깊은 수비를 펼치고, 내야와 외야 사이로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가 나온다.
이승엽은 "매 타석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직은 운이 많이 따른다"고 자신을 낮췄다. 이어 "사실 몸 상태도 좋지는 않다. 왼 어깨에 미세한 통증이 있어 내가 원하는 타격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통증은 거의 사라진 상태. 이승엽 자신이 만족할 만한 타격폼을 찾으면 상대 투수는 '더 무서워진 이승엽'과 맞서야 한다.
이승엽은 4월 타율 0.167로 부진했던 팀 후배 최형우(29)에게도 용기를 북돋았다. "형우에게 4월은 잔인했을 텐데 4월이 끝났잖아요."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을 영입하며 '중심타자'이자 '베테랑 선수'의 역할을 기대했다. 구단은 팬들 앞에서도 '스타'다운 이승엽을 원했다. 이승엽은 모두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있다.